▲친숙한 관광지가 되어버린 살해당한 유럽의 유대인들을 위한 기념비를 놀이터처럼 생각하며 자유롭게 노는 관광객이 늘며 문제가 되고 있다. 실제로 기념비 구역 내에서는 과도한 소음 유발, 콘크리트 블록 위로 돌아다니는 행동, 애완동물과 동, 자전거 주차, 흡연 및 음주가 금지되어있다.
신희완
당시 연방의회 의장인 리타 쥐스무스(Rita Süssmuth)와 녹색당의 폴커 벡(Volker Beck)이 의회에서 기념비 조성을 위한 토론을 주도하며, 아이디어를 살려냈다. 여론과 정치권의 지원을 바탕으로 다시 두 번째 공모전을 주최하게 되었다. 1997년 7월 528개의 작품 중 피터 아이젠만과 리처드 세라의 작품이 당선돼 2차 공모전이 마무리된다.
디자인은 준비되었지만, 그 기념비를 만들 돈이 부족했다. 공사를 위해서는 후원회로 모은 돈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 공모전의 당선작은 헬무트 콜 총리가 굉장히 선호하는 작품이었고, 정치권에서는 1999년 수도 이전에 맞춰 기념비를 완공하자는 목소리도 나왔다. 기념비 사업은 무리가 없이 진행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쉽지 않은 길이었다. 지난번 반대자였던 총리는 찬성이었지만, 이번엔 독일의 여론과 지성인들의 반대가 있었다. 주된 비판 대상은 기념비에 유대인 희생자들의 이름과 학살 장소 등이 기록되지 않은 문제 때문이었다. 아무런 기록이 없는 추상적인 콘크리트 덩어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과거의 증인도 되지 못하고, 미래를 위한 신호도 되지 못한 작품이라는 비판 등 부정적인 비평이 끝이 없었다. 당시 베를린의 시장이었던 에버하르트 디프겐(Eberhard Diepgen)은 그 어떤 작품도 (홀로코스트의) 참혹함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이 없다며, 기념비 공모전 결과 자체를 비판했다. 또한 얼마 전 타계한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 역시 기념비 사업은 중단되어야만 한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