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그레코의 물잔카페 그레코에서는 물잔도 저렇게 나옵니다. 1760년부터라고...
박용은
'그레코'가 지금의 명성을 얻은 것은 이 카페를 찾은 예술인들의 연대기 때문입니다. 두서 없이 그냥 명단만 한 번 나열해 볼까요? 괴테, 오펜바흐, 멘델스존, 쇼펜하우어, 리스트, 바그너, 빌헬름 뮐러, 보들레르, 스탕달, 안데르센, 바이런, 키츠, 셸리, 고골리, 호손, 마크 트웨인, 오스카 와일드, 프루스트, 발자크, 니체, 토마스 만, 코로, 베를리오즈, 롯시니, 비제, 구노, 토스카니니.
그 이름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은, 이들을 제외하고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의 서양 예술사를 쓸 수나 있을까 싶은, 수많은 나의 영웅들의 호흡과 체취와 정신이 가득한 곳이 바로 '앤티코 카페 그레코'입니다.
나비넥타이에 연미복을 멋지게 차려 입은 종업원이 안내해 준 자리에 앉습니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라 샌드위치와 함께 탄산수, 커피를 주문합니다. 그리고 아이패드에 저장해둔 괴테를 읽습니다.
"나는 로마에 발을 들여놓은 그 날부터 진정한 재생의 나날들을 세고 있다. 나는 새로운 청춘으로 살고 있으며 매일 매일 새 곡식을 탈곡하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으로 새로 탄생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 나 자신을 되돌아오게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내 정신은, 확고부동한 것이 되었고, 따뜻한 것을 잃지 않는 진지한 것이 되었으며, 즐거움을 잃지 않는 침착성을 얻었다." - 괴테, "이탈리아 여행" (을유문화사 1989) 재편집아닌 게 아니라 나도 이제 정신을 좀 차려야 될 것 같습니다. 한 달 간의 여행 중 이제 겨우 첫 날 오전 일정이 지났을 뿐인데, 봇물처럼 밀려온 로마에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되어 몇 달 간 공부해 온 것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저 감탄과 탄식과 눈물만 이어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초보 여행자라지만 이래서는 한 달을 제대로 버틸 수나 있을지 의문입니다. 다시 다음 일정의 자료들을 훑어보고 짧은 글을 씁니다.
그런데 자꾸 옆 자리, 앞 자리에 눈이 갑니다. '앤티코 카페 그레코'에서는 이렇게 괴테가, 바이런이, 스탕달이, 오스카 와일드가 자꾸만 말을 걸어옵니다. '찌질한, 카페 좌파'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허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