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한 '세월호'2014년 4월 16일 오후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한 인천발 제주도행 여객선 '세월호' 주위에서 수색 및 구조작업이 벌어지고 있다.
해양경찰청 제공
그의 고통이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사진과 증언 등으로 참사를 간접 체험했을 뿐인 나와 달리 김씨는 '그날 그 배'에서 살아 돌아왔다. 애타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기울어진 세월호의 3~4층 갑판을 정신없이 뛰어다녔고, 배가 완전히 뒤집히던 때까지 다른 승객들을 도왔다. 그럼에도 김씨는 괴로워했다.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지 못한 채 살아 돌아온 죄인이라며.
참사 당일부터 1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지만 김씨는 늘 자책하고 있다. 지난해 5월 13일, 제주도의 한 병원에서 그를 만났을 때부터 변함없었다. 1시간 가까이 진행한 인터뷰에서 김씨는 해경의 무능을 질타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중간 중간 목소리가 잦아지던 순간이 있었다. '죄책감'을 털어놓을 때였다. 김씨는 참사 당일 기억에 드문드문 빈 곳이 존재한다고, 죄책감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관련 기사 :
"해경은 살릴 마음이 없었다").
"(구조된 다음) 진도체육관에 가보니까 부모들이 와서 통곡하는데… 살아온 게 죄인이라고… 그때 그 감정은 아무도 모른다. 지금도 그 죄책감에… (4월 16일) 오후 7시 넘어서 체육관에서 나왔다. 미안하니까 우리(화물기사들)는 광주라도 보내달라고. 빨리 제주도로 가야겠다고. 학생들은 계속 시신으로 올라오고, 학부모들은 계속 울고, 찾고 난리인데 (우리가) 어떻게 계속 거기 있을 수 있겠나." 끝내 구조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거듭 미안해하던 그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 말이 위로가 되진 않겠지만… 너무 괴로워하시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병실을 나선 게 전부였다.
그와 가족의 생계수단인 4.5톤짜리 화물트럭도 세월호와 함께 검푸른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3개월 정도 나오는 정부의 생활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김씨는 세월호를 잊지 않았다. 자신을 줄곧 괴롭히고 있는 죄책감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2014년 10월 21일 세월호 선원들의 1심 28차 공판에서 여전히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했다(관련 기사 :
"아침마다 바다에서 학생들 헛것을 봅니다").
"어제 자살을 하려고 했다. 한라산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그렇게 정신적으로 힘들다. 아침마다 바다에 나가 학생들 헛것을 본다. …(중략)… 해경이 저한테 와서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선장이 살인자죠?" 이랬다. 선장이 살인자면, 해경도 살인자다. 나도 살인자다."4월 16일 세월호에 갇힌 채 버티고 있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