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발치골목길 정상에 올라 바라본 성북동 전경
하도겸
성벽 아래에 이어진 그 길을 걸으며 내려다보이는 성북동 풍경은 참으로 편안하다. 세상에서 한발짝 떨어져 휴식을 취하길 원하는 사람에게 딱 맞는 '휴(休)'의 장소다. 북정마을과 같이 구석구석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에 자리잡은 노인정 등은 이 소중한 마을을 지켜온 어르신들(지킴이)의 소박하면서도 친근한 정취마저 느끼게 한다. 특유의 넉살로 동네 어르신들이 드시는 막걸이와 파전 동냥에 여지없이 성공한다.
흔쾌히 마련해 주신 동석 자리에서 머리로만 알고 있었던 커다란 현대사 사건들의 내막이 여과없이 폭로된다. 연세보다 정말 젊게 사시는 노인들의 힘센 입담은 역사교과서와 언론을 통해 배운 우리 현대사가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신랄하게 알려준다. 목소리가 참으로 큰 어르신들은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의 내막을 슬로우 모션의 비디오테이프처럼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건 이거 아닌가요?'라는 질문에 바로 'A! 그게 아니지!'라며 즉문즉설을 하시는 어르신들의 언쟁에 가까운 말씀 속에는 젊은 시절의 열정과 후회, 그리고 미련이 느껴진다. 젊고 건강한 청춘 시절 우리가 어떤게 살아야 하는지 암시해준다. 후회없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뒤돌아보게 하는 입담이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찍은 하루하루의 살아 숨쉬는 그들의 기록들을 난 천천히 다시 소처럼 뒤새김질하며 공짜 막걸리로 굵은 목을 축이고 있다. 비워진 잔은 이제 다시 돌아갈 골목이 날 부르는 신호인가 보다. 이제 더 무거워진 몸을 다시 일으켜 골목을 걸으며 나를 돌아볼 시간을 가지라는 말없는 말이 마음으로 전해온다. 이심전심에 물아일체가 이런 것인가?
오르막과 내리막, 끊어짐과 이어짐 그리고 올곧음과 굽어짐이 복합되어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 골목길. 그 길을 아무생각없이 아니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정처없이 따라다닌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은 길이 초췌하게 뼈대만 앙상한 빈집에 가로막히기도 한다.
허탈함과 낙담으로부터 두려움, 공포 그리고 작은 소소한 기쁨까지 만끽하게 해준다. 갈라진 골목에서 주어지는 끊임없는 선택의 기회는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흥미진진하기까지 하다. 이 길로 가면 난 어떤 길을 걸을 것이며 어떤 집을 보며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난 거기서 또 하나의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또 소소하지만 범상치 않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런거 다 집어 치우고 그냥 그냥 그렇게 바다까지 흘러가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게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