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뤼벡의 토마스 만의 집영화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Buddenbrooks)』무대이기도 했던 독일 뤼벡의 토마스만 박물관이자 그의 집. 2010 년
배수경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피에서인지 짜릿한 냄새가 가볍게 공중으로 퍼지고 있었고,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게 그때 마침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시체의 머리칼이 살살 나부끼는 것이 보였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 산문집 중에서 영예와 부를 자랑하고도 남을 만큼의 대저택에는 이제 멋진 가구도, 콧대 높은 귀족 가문의 사람들도 찾아보기 어려운 채 바람에 날리는 커튼들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언제나 바람 만큼 삶의 본질을 드러내는 존재는 없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렇듯 한 영화의 엔딩컷으로 자리잡아, 커다란 빈 공간 사이로 오롯이 바람만이 불고 있는 묘사는, 무심한 관객에게도 충분히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어떻게 이토록 평화로우나 차갑고, 아름다우나 잔인할 만큼 생의 단면들이 여실히 드러나는 설정이 있을 수 있을까?
토마스 만의 집 앞 골목으로 지난 2010년 5월, 북부 독일의 안개가 짙고도 차분하게 내려 앉아 있는 날이었다. 저 끝 어디선가, 인간 시간의 그 찰나성을 비웃기라도 하듯 영화 속 마차 한 대가 달려올 것만 같아 나는 골목 어귀를 한참 동안 배회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창백한 외벽과, 집 안의 가구들에 뒤집어 쓰인 하얀색 천들은 오래 전 떠났던 부덴브로크 가 사람들의 형상을 꼼짝없이 대면케 하고는, 산다는 것의 본질 앞에 이방인의 마음조차 겸허해지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