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리 에브도 최신화 표지마호메트를 풍자한 샤를리 에브도 최신화 표지
샤를리 에브도
그러나 1월 14일 <샤를리 에브도>가 이슬람의 사도 무함마드를 만평에 다시 등장 시키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슬람권은 이를 강력히 비난하면서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는 구호와 현수막이 시위에 주로 등장했다. 파키스탄, 이집트 등 중동국가는 물론이고 니제르 등 아프리카 국가에서도 반프랑스 그리고 반표현의 자유 시위가 이어지고 폭력사태도 발생했다.
이슬람권 정부, 종교기관, 그리고 시민의 절대 다수는 테러를 비난한다. 사실 이슬람권이 테러의 가장 큰 피해자다. 일부 테러가 유럽 등 서방세계에서도 발생하지만 대부분의 테러공격은 중동을 무대로 한다.
그러나 적지 않은 중동인들은 이 같은 테러와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라는 담론이 등장하는 것에는 서방의 책임도 있다고 주장한다. 카타르의 유력 일간지 <알-아랍>의 압둘라 알-아트바 편집장은 1월 8일 트위터에 "왜 이슬람권이 이번 테러에 사과해야 하나. 런던의 모스크가 박해받을 때 그 누구도 기독교인이나 영국인에게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글을 올려 주목을 받았다. 1월 19일 체첸에서 열린 집회에서는 람잔 카디로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서방 언론인과 정치인들이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거짓 구호 아래 무슬림의 믿음을 모욕하고 있다"고 서방의 표현의 자유 남용을 꼬집었다.
갈등의 근원 '라 일라하 일랄라'표현의 자유를 놓고 이슬람권과 서방이 대립하는 이번 사태의 뿌리에는 나름 종교적인 배경이 있다.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권 간 갈등의 종교적 시발점은 '라 일라하 일랄라(알라 외에 다른 신은 절대 없다)'다. 이슬람의 가장 중요한 믿음이다. 창조주 알라 외에 다른 신성한 존재는 절대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신성도 부인하는 것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고 구약을 인정하는 이슬람교이지만 사도들에 대한 시각은 크게 다르다. 모든 사도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알라의 계시를 인류에 전한 인간이다. 이슬람을 창시한 무함마드도 알라의 계시를 이 땅에 전한 사도일 뿐 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100% 인간일 뿐이다. 알라의 계시에 의거해 이슬람 공동체를 건설하고 평화와 정의를 추구한 종교 및 정치지도자일 뿐이다. 때문에 무함마드가 혹시나 신격화될 것을 우려해 성화조차 그리지 않았다.
이슬람이 이처럼 강력한 유일신사상 체계를 구축한 배경에는 이슬람 공동체 건설이라는 정치적 목적이 내재되어 있다. 무함마드가 7세기 이슬람을 설파할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와 메디나에는 이미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었다. 첫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가 두려움에 떨며 계시 내용을 상담한 대상이 기독교인이었다. 메카와 메디나를 통일해 이슬람공동체 구축에 성공한 이후 예언자 무함마드가 창조주 알라의 최종 완결판 계시를 받았다는 신학체계가 마련된다.
구약에 등장하는 사도들은 부분적인 계시들을 받아왔고, 이들 계시를 종합해 완결된 최종본이 무함마드에게 내려졌고, 바로 그것이 쿠란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슬람은 기독교와 유대교를 형제 종교로 인정한다. 하지만 이슬람이 알라의 최종 계시를 받은 완벽한 종교이며 무함마드가 마지막 사도라고 믿는다. 뿌리를 공유하지만 유대교와 기독교와는 차별성을 두어 이슬람이 '완벽한' 종교라는 신학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무슬림들은 그 신학체계 하에서 알라의 계시에 따른 가장 이상적인 이슬람 국가와 사회가 건설되었다고 믿는다. 무함마드와 그의 뒤를 이은 4명의 정통 칼리파(후계자) 시대다.
위기 때마다 등장하는 종교적 반감'완벽하고 이상적인' 이슬람 국가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100년도 안 돼 스페인 남부까지 장악했다. 예루살렘을 포함한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기존 기독교 사회도 이슬람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 이슬람은 기독교 공동체를 인정했다. '지즈야(jizya)'라는 인두세만 내면 유대교와 기독교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 받을 수 있었다. 상당 기간 세 종교는 평화적 공존을 이어갔다. 이집트에는 현재도 1000만 이상의 기독교 정교도들이 남아있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하고 아랍과 전쟁을 벌이기 이전에는 유대인들도 중동의 곳곳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다.
따라서 이슬람과 기독교 간의 충돌은 종교적 갈등이라기보다는 정치경제적 이해로 기인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 본격적 시작은 '십자군 전쟁'이다.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무슬림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8차례에 걸쳐 원정을 감행했다. 전쟁에 참가한 기사들은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다. 때문에 이 원정대는 십자군으로 불렸다. 종교적 상징이 전쟁에 동원된 것이다. 이로 인해 아직도 십자군 전쟁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싸움이라는 종교적 해석이 강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종교적 배경이 전쟁을 전적으로 좌우한 것은 아니었다. 봉건영주와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했다. 호기심, 모험심, 약탈욕구 등의 동기가 신앙적 열정과 합쳐진 것이었다. 반면 이슬람 세력은 유럽인들을 '무자비한 하얀 악마'들이라고 부르며 지하드(성전)로 맞섰다.
14세기 이후 오스만제국의 유럽 동부 발칸반도 장악은 또 다른 긴장을 불러왔다. 하지만 1683년 제2차 비엔나 포위 작전 패배한 오스만제국은 점차 약화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 이후 강성해진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을 계기로 이슬람권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세력 확대로 수세에 몰린 터키가 1922년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이슬람제국은 완전히 사라졌다. 대부분 중동 지역은 서방의 통제 하에 있었고 이 과정에서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한다. 위기에 처한 이슬람권을 구하기 위한 사상적 조류가 등장한다. 이슬람 부흥주의다. 유럽 기독교세력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서방의 문화적 침탈을 막기 위해 많은 지식인들이 이슬람을 통한 정체성 회복과 정치적 단합을 부르짖는다. 테러를 감행하지는 않았지만 현재의 반서방 이슬람주의의 근간이 되는 정치적 사조가 등장한 것이다.
문명의 충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