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탄을 맞은 상흔이 남아있는 초지진의 소나무와 성벽
이승숙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어 있는 초지진은 우리 역사 속에 여러 번 등장한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이곳에서 프랑스 및 미국 함대와 싸웠고, 1875년(고종 12년)에는 연안을 마음대로 측량하고 다니던 일본 군함 운요 호와의 무력 충돌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 일명 강화도조약으로 불리기도 하는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맺게 되었으며 그 뒤 우리나라는 일본의 손아귀에 빠지는 불행한 역사를 겪기도 한다.
초지진 광장에 서서 성벽 앞에 서있는 소나무를 올려다본다. 포탄을 맞은 흔적이 있는 소나무는 초지진을 대표하는 얼굴이다. 신미양요 때 미군이 쏜 포탄을 맞은 것일까, 아니면 운요호 사건 때 일본군의 함포 세례를 받은 것일까. 나란히 서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는 지나간 역사를 말없이 보여 준다.
초지진은 강화해협의 길목에 있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래서 지키는 병사들도 많았다. 군관(軍官) 11명에 사병 98명, 그리고 돈대에서 바다를 경계하는 돈군(墩軍) 18 명 등을 두고 앞 바다를 통한 적의 침입을 경계했다.
초지진에는 초지돈(草芝墩)·장자평돈(長者坪墩)·섬암돈(蟾巖墩)이 소속되어 있었고, 포대에는 9개의 대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백여 명의 군사들이 초지진과 부속 돈대들을 지키고 관리했던 것이다. 이 사실만 봐도 초지진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