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산문중국은 장백산으로 표시하고 있다. 한자 위에 한글로 표기한 것도 지워버렸다. 사진은 7년여전 상황이다.
조창완
이런 가운데 해방 당시 100만 명 가량이던 조선족 인구는 200만 명 가량으로 늘었다. 동북 뿐만 아니라 연해지방은 물론이고 네이멍구, 깐수 등 서북부 지역까지 넓게 분포했다. 조선족은 언어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문화를 유지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다. 또한 중국 정협 부주석을 지낸 조남기 장군을 비롯해, 소수민족 사업을 총괄하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이덕수 주임(장관급), 중국 공군을 세운 인물 중에 하나인 이영래 공군 중장, 락스타 최건 등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이런 동포사회에 가장 큰 격랑은 1992년 한중수교였다. 한중수교로 우리 기업의 중국 진출이 봇물을 이루자 한국어와 중국어가 능숙한 동포들의 쓰임이 많아졌다. 대도시로의 급속한 이주가 시작됐다. 친척 방문 등의 방식으로 한국으로도 급속한 인구 유입이 진행됐다.
200만 명의 동포 대부분이 동북3성에 거주했는데, 20여년만에 그 인구는 1/3 수준으로 떨어졌다. 부모가 떠난 자리를 조부모가 대신하는 조손가정이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한국어를 가르치던 조선족 학교도 급속히 폐교되어 갔다. 중국 내 문맹률이 가장 낮았고, 교육과 과학쪽을 주도하던 동포의 세력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취재 중에 만난 중국 동포 가운데 잊을 수 없는 분이 있다. 중국 공산당학교 교수를 지낸 최용수 교수가 바로 그분이다. 최 교수를 만난 것은 '나를 사로잡은 조선인 혁명가 김산'(KBS 스페셜)의 현지 코디네이션을 맡으면서다. 취재진은 최 교수님을 인터뷰했고, 개인적으로 '한락연'에 관심을 가져보라는 말과 최 교수님이 정리한 '한락연' 회고집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2008년 귀국 후 시간을 두고 연락을 했다가, 최용수 교수의 부음을 들었다. 통화를 하는 사모님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최 교수의 죽음은 한국에 알려지지 않았고, 평상시 그가 심혈을 모아서 수집했던 자료에 관심을 갖던 한국인이 하나도 찾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장례를 치렀다는 소식 때문이다. 최 교수는 아픈 몸을 이끌고 한국 답사단의 옌안(延安) 답사에 동행해 주었고, 결국 한국에서 강연하다가 쓰러졌다. 거의 저승 문턱까지 다녀온 몸으로 중국에 돌아와 투병했지만, 2008년 8월 끝내 세상을 떠났다. 나 역시 뒤늦게 부음을 듣고, 그를 기리는 기사 한편 쓴 것이 고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