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근무했던 국제학원(국제대학) 건축학과 건물. 칭다오 이공대학교 캠퍼스에서 가장 역사적인 건물로, 1950년대 유행했던 소련식 건축이다.
칭다오 이공대학교 홈페이지
중국 학생들을 만나기 전, 나는 예전의 아릿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 시절의 나를 닮은 중국학생들을 그려보았다. 추억의 명화를 다시 볼 때의 설렘이랄까. 나는 그 기분을 안고 첫 수업 설계실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곳에는 내가 알던 중국 학생은 없었다.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에 긴 생머리의 여학생, 짤막한 깍두기 머리 모양의 남학생은 예전에 보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다들 빈티가 아니라 반짝반짝 윤기가 났다. 잘 먹고 잘 자란 티가 났다. 학생들은 나보다 더 좋은 핸드폰과 노트북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모나미 플러스 펜을 한 다스로 사서 쓰는 학생도 있었다.
어느 여학생에게 온 택배 상자 속에는 한글이 깨알 같이 적힌 화장품이 들어 있었다. 한국 제품이 가격 대비 품질이 좋고 예뻐서 산다고 했다. 가격 대비? 싸다는 말인가? 중국에서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좀 묘했다. 듣자 하니 어떤 학생은 중국에서 비싸다던 삼성 노트북으로 도면을 그리고, 인터넷으로 상하이 화방에 수입 모형 재료를 주문하고, 완성된 모형은 캐논 DSLR 카메라로 찍는단다. 학비가 많이 드는 5년제 건축학과라서 그런지, 돈 때문에 바들바들 떨 것 같은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리란(李兰)이 생각났다. 리란은 미국에서 나와 같은 건축대학원을 다녔다. 하얼빈에서 온 그녀는 영어든 건축이든 막힘이 없었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해결했고 생활비는 학교 조교를 해서 벌었다. 점심시간이면 리란의 남편이 집에서 만든 도시락을 가지고 설계실에 나타났다.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서였다.
리란의 남편은 학생이 아니라 전업주부였다. 그는 집에서 살림을 도맡아 하며 아내를 뒷바라지했다. 중국에서 캠퍼스 커플이었던 두 사람은 원래 같이 유학준비를 했는데 리란만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리란이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직할 무렵 남편이 공부를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은 중국인 유학생을 모두 고학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가 2000년이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한 지도 이미 20년이 넘은 시기였다. 2000년이면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이미 1조 달러에 달했고 인구는 13억이 넘었다. 일인당 국민소득은 세계 하위에 속하지만, 고속 경제 성장 덕에 신흥 부자들이 많이 생겼고 계층 분화도 일어났다.
2000~2001년에 유학을 간 중국 학생 8만5천 명 중 70% 이상이 미국으로 갔다. 내가 미국에서 목격한 중국 유학생은 일부에 불과했던 것이다. 학비와 물가가 싼 텍사스의 주립대학교가 아닌, 뉴욕이나 보스턴의 사립대학으로 간 공산당 고위 간부, 국영기업의 임원, 기업체 사장의 자녀들은 차원이 다른 유학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중국인에 대한 이미지는 왜 그렇게 싸구려로 비춰졌을까?
당장 대형마트만 가도 알 수 있었다. 가장 싼 생활용품은 '메이드 인 차이나'였다. 한국식으로 치면 1000냥 하우스인 원 달러 숍 물건도 죄다 중국산이었다. 한국 제품은 전자 코너에 있었다. 최고급으로 쳐주던 일본 제품에 비하면 가격은 좀 낮았지만 품질이 좋다고 인기가 많았다.
사람들은 마트 매장의 서열에 따라 국가를 인식했다. 일본은 특별한 동양이었고, 한국은 일본보다는 못하지만 이제 제법 사는 나라, 중국은 아직 갈 길이 먼 나라쯤으로 구별을 했다. 그 구별법이 다시 국민의 이미지를 결정했고 사람에 대한 대우도 달랐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사자인 우리가 그것을 잘도 받아들이고 심지어 재생산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자전거와 자동차로 중국 유학생과 한국 유학생을 구분했던 것처럼. 내 머리 속에 저장된 중국인의 이미지가 획일적인 것도 그 탓이었다.
'소황제'로 자란 중국 '바링허우' 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