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김구선생과 이청천 등이 회의를 하다가 이운한의 저격을 받고, 죽음 직전까지 다달았다. 후난성 정부는 이곳에 임시정부 기념지를 만들었다.
조창완
이후 임시정부는 난징(1935~1937), 창사(1937~1938), 광저우(1936~1939), 치장(1939~1940), 충칭(1940~1945)을 옮겨 다니면서 우리 민족의 법통을 유지했다. 가장 극적인 곳 가운데 하나가 창사다.
1938년 5월 6일 밤 창사 시내에 있는 난무팅에서 국무위원 김구를 비롯해 군사위원 현익철, 유동열, 이청천 등이 회의를 하고 있는데, 이곳에 이운한이 들어와 총을 난사했다. 현익철은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 숨졌고, 김구 선생 역시 얼마 가지 못할 것으로 파악해 치료조차 포기했다. 다행히 여전히 숨이 붙어있자 치료를 시작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1년 후 역시 같은 민족의 흉탄에 쓰러질 운명이었지만.
천신만고 끝에 김구 선생이 이끄는 임시정부는 충칭에 도착했고, 광복군 조직 등 한반도 진공을 위한 작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일본군에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중국 남부 대륙은 지나 임시정부에 도착한 김준엽 등도 임시정부가 없었다면 이런 시도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임시정부의 힘을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카이로회담 등을 통해 확인된 한국의 독립은 이런 노력들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임정 요원들은 광복 이후 미국의 방해에 부딪쳐 11월에야 귀국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에 돌아온 백범의 여정 역시 수많은 갈등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분단된 대한민국은 있을 수 없다며 남북을 드나들던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운명했다. 그토록 염려하던 조국의 분열을 부른 한국전쟁은 꼬박 1년 뒤에 왔다.
임시정부가 진행되던 시기 중국과의 역학 관계는 동아시아 패권 쟁탈과 중국의 내전이라는 복잡한 상황이 같이 동반됐다. 중국은 제 1차 국공합작(1924.1~1927.7)과 2차 국공합작(1937.9~1945.8)을 거치면서 내부적으로 공산당과 국민당의 역학관계가 정리되던 시기였다. 일본은 만주사변(1931년 9월)으로 야욕을 보이기 시작했고, 중일전쟁(1937년 7월)을 거치면서 그 욕망의 수치는 태평양 전쟁으로 치달았다.
우리 임시정부는 초반기부터 민족주의 노선을 좇았다. 의혈투쟁보다는 외교적 노력 등을 우선적으로 사용했다. 반면에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이나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항일운동 세력은 무력전을 중심으로 했다. 다행히 1940년대 들어서는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 세력은 좌우익을 통합하면서 한반도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그럼에도 한반도는 분단의 방향으로 나아갔고, 결국 이런 현실은 한국 전쟁이라는 비극적 상황으로 치달았다.
무력전쟁에서 경제전쟁으로당시가 군사에 의한 '무력전쟁'의 시기라면 지금은 무역과 금융 등이 복잡하게 융합되어 있는 '경제전쟁'의 시기다. 경제성장의 동력을 잃어 버린 일본은 금융 권력을 유지하려는 미국과 함께 중국 세력을 역이용해 다시 한 번 성장 동력을 잡기 위한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원하든 원치 않든 이 대결의 방아쇠 같은 역할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특히 중국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26%에 달하는 상황이라 중국의 입장을 외면했다간 순식간에 경제 동력을 잃어 버릴 수 있다는 점도 위기감을 고조 시킨다. 반면 금융 정책 등이 중국 쪽에 가까워질 경우 미국과 일본의 협공을 받아 더욱 어려운 지경에 빠질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에선 성급한 선택보다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청일전쟁이 촉발하던 무력 전쟁의 시대가 아니다. 또 필연적으로 중국은 한반도가 위기로 가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 이 상황에서 섣부른 판단은 자칫 위기를 만들 수 있다.
김구 선생은 국내의 지원이 거의 없는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중국에 의탁하기 보다는 독자적인 힘을 기르기 위해 끊임없는 외교적 노력을 시도했다. 특히 광복군을 미국 전략정보국(OSS)에게 위탁해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는 등 중립외교에도 힘썼다. 장제스의 국민당 도움도 받았지만, 마오쩌둥의 팔로군과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중립외교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런 의지가 담긴 글이 앞에서 소개한 '나의 소원'이다.
김구 선생은 귀국해 정권을 이루지도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하지만 그가 가진 정신이나 행동은 중국 땅 곳곳에서 후손들을 일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