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루슈위앤의 편액양쪽 편액에는 "오직 (이곳) 초나라 땅에서 인재가 나니, 이곳에서 번성하리라"라고 쓰여 있어 호남에 대한 자부심이 살아있다.
조창완
창사를 대표하는 여행지는 위에루슈위앤(岳麓書院)이다. 송대 4대 서원중 하나이며, 중국 남부를 대표하는 지성의 산실이다. 북송시대인 976년에 세워진 후 주희와 장식이 지성대결을 펼치면서 중국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중국에서 처음 유물론 사상을 편 왕부지가 가르쳤고,증국번이나 좌종당 등의 명사도 이곳을 거쳤다.
마오쩌둥 역시 이곳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이곳이 배출한 중국 근대 교육의 선구자인 양창제는 마오쩌둥의 첫 부인인 양카이후이의 아버지였다. 마오 역시 위에루슈위앤 아래 자리 잡은 호남사범학교에서 공부해, 이곳의 정기를 받았기 때문이다.
후난의 정서를 가장 많이 펼친 인물이 초한지의 한 주인공 항우다. 유방에게 패해 자결한 항우와 함께했던 초나라의 중심지가 지금의 창사다. 그뿐만 아니라 회왕에 실망해 자결한 굴원도 이곳이 정치적 고향이었다. 한마디로 의기가 있는 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후난을 대표하는 맛은 매운 맛이다. 중국에는 "쓰촨 사람은 매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후난 사람은 맵지 않을까 두려워한다"는 말이 있으니 매운 것 좋아하기는 후난 사람이 한 단계 높다. 이런 특성은 중국 혁명기에 빛이 났다. 마오쩌둥을 비롯해 펑더화이, 허롱 같은 장군들과 류샤오치나 런삐스, 후야오방 같은 정치인들이 이곳 태생이다. 후난이 없다면 중국도 없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중국 성립과정에서 후난사람들의 역할을 컸다.
그 가운데 마오는 후난인의 특성을 전형적으로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확고한 자기주장을 바탕으로 정치 일생 내내 다양한 수 싸움을 벌이면서 생존했다. 마오의 존재감이 가장 먼저 들어난 것은 준이회의다. 대장정의 중간인 1935년 1월 15일에서 17일까지 열린 회의에서 마오는 외국 군사고문들에게서 홍군의 주도권을 가져와 중국식 사회주의의 첫발을 내딛는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위기가 찾아온다. 이번에 상대는 엘리트 군인이자 정치인 장궈타오(張國燾)다. 베이징대학 시절 교수였던 장궈타오는 사서였던 마오에 대한 우월의식을 갖고 있던 차에 숫자적 우세를 가진 제4방면 군(軍)을 이끌고 있었다. 이 만남은 기 싸움 끝에 서로 다른 길을 가지면 장궈다오가 이끄는 군대가 참패하면서 홍군의 주력은 마오 쪽이 이끌게 된다.
마오는 옌안시절을 성공적으로 이끈다.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톈안먼(天安門)에서 축배를 들 수 있었다. 해방 후 중국 공산당에게 가장 큰 문제는 국민당의 지배 당시 엄청나게 급등한 물가를 잡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역할을 '재정의 마술사'라는 천윈(陳雲)이 놀라울 정도로 빨리 해결했다.
출판사의 견습공으로 사회에 첫발을 디딘 후 노동자 출신 간부로 양성된 천윈(陳雲)은 공산화와 더불어 부총리가 되는 한편 재정경제위원회 주임을 겸직해 물가 장악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1949년 11월 13일 물가폭등 방지를 위한 긴급지시를 발동하는 한편 지폐의 발행을 억제하고, 식량과 면사 등을 나라가 관리하는 방식을 택해 쉽게 물가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1950년 6월 한국전쟁(韓國戰爭)이 일어난 후 중국은 미묘한 입장에 빠졌다.
전쟁 후반에 펑더화이(彭德懷)를 사령관으로 지원군이 파병된다. 전적으로 불확실한 파병이었지만 확전을 부담스러워한 미국의 입장으로 잘 봉합된다. 이런 외파와 달리 중국 내부에서는 토지개혁 등 완전한 사회주의의 변화를 위한 조치들이 시행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백만명에 달하는 지주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토지개혁은 환영을 받았고, 더불어서 마약 등 구악을 타파하고, 교육을 강화하는 등 사회의 토대를 만들어갔다.
한국전쟁 등 외부의 상황이 정돈되고, 토지개혁 등 내부의 중대 사안이 정리되자, 국가산업 정비를 위한 1차 5개년 계획(53~57년)이 시작됐다. 다행히 첫 5개년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종이호랑이로 전락해 서양으로부터 뭇매를 맞는 문제를 해결한 이후 드디어 배고픈 문제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1차 5개년 계획 다음을 움직일 중요한 회의는 1958년 8월 아름다운 휴양도시 베이따이허(北戴河)에서 열렸다. 이 회의 최대 사건은 대약진(大躍進)운동의 공식적인 추인이다. 57년 이후 '백화운동(白話運動)' 등 지식개조에 이어 마오쩌둥(毛澤東)은 인민공사(人民公社) 운동을 포함한 대약진(大躍進)운동의 승인을 끌어냈다.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세력과 더불어 끊임없는 논리싸움으로 결정되는 이 중요한 회의에서 마오의 주도하에 대약진(大躍進)은 공식적으로 추인된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다. 1차 5개년 계획이 성공적이었지만 식량 생산에 비해 인구가 급격히 증가해 식량난의 우려가 있었다.
농촌에 대대적인 인민공사를 설립할 문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고, 삼면홍기(三面紅旗)운동으로 대약진(大躍進)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결국, 이 정책은 현대 중국이 실시한 경제정책 중 최악의 실수였다. 중공업 발전을 위해 맹목적으로 쇠붙이를 모아 용광로에 던지는 꼴로 시작된 이 정책으로 인해 식량생산은 급감했고, 개인에게 지급되는 곡물량은 57년 205kg에서 계속해서 떨어져 59년에는 183kg, 61년에는 154kg까지 떨어졌다.
결국, 이 기간 동안 2천만 명이 기아로 목숨을 잃는 처참한 상황이 계속됐지만, 책임을 두려워한 지방정부의 잘못된 보고로 인해 이 정책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다. 다행히 1959년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마오쩌둥(毛澤東)에 이어 국가주석이 된 류사오치(劉少奇)가 경제정책을 수정해가면서 62년 이후에는 약간 회복기미를 보인다.
류사오치(劉少奇)가 움직일 수 있는 데는 61년 6월말 '재정의 마술사' 천윈(陳雲)이 상하이 부근 칭푸(靑浦)현을 방문해 어려운 상황을 파악해 인민공사의 정황을 보고함으로써 지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류사오치(劉少奇)는 통치나 경제정책 수립 과정에서 기술 우선, 엘리트 존중 등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시작됐다. 류사오치(劉少奇)에게 권력의 일부와 대중의 인기까지 일부 내준 마오쩌둥(毛澤東)으로서는 만회할 기회를 얻어야만 했다. 솔즈베리 '새로운 황제들'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권위에 젖어든 마오는 반격을 엿보았고, 손자병법(孫子兵法)에도 능해 '성동격서' (聲東擊西 동쪽으로 소리치고 서쪽을 공격한다는 뜻으로 적을 교란시키는 방법을 일컬음)를 잘 알았던 마오쩌둥(毛澤東)은 그 계기를 1959년 지앙시(江西)성의 휴양지인 루산(盧山)에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