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리파', 루브르 박물관 소장 로널드 사임은 아그리파의 초상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의 초상들은 그가 엄격하고 장중한 얼굴 모습에 화가 난 듯하고 도도하며 의연한 인상을 지닌 만한 인간임을 보여주고 있다."
Marie-Lan Nguyen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제국의 제1인자,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는 두 명의 충신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해 보자.
첫번째 사나이,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기원전 63~12). 이 사람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그냥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이었다고 소개하기엔 너무 부족하다. 충신, 아니 충복, 아니 최고의 동료 등등… 아마도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승리에는 아그리파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의 가계가 로마의 귀족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무슨 계기에서인지 옥타비아누스와는 어린 시절부터 가까웠다. 나이도 동년배였다. 같이 배우고 같이 놀았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양아들로 입적되었을 때, 그는 카이사르의 눈에 띄어 옥타비아누스의 조력자로 임명되었다. 카이사르가 벌인 내전에 참전했을 때 카이사르가 거기에서 그의 활약을 눈여겨 보았던 모양이다.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를 로마군단에서 훈련시키기 위해 아그리파를 붙여 마케도니아 아폴로니아에 보냈다. 카이사르가 암살되기 4개월 전이었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아그리파는 국방장관 혹은 참모총장의 역할을 했다. 그는 안토니우스와의 마지막 전투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내전의 종지부를 찍고 사실상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탄생시켰다. 그는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전쟁에 참전해 대부분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는 모범적인 겸손을 보이면서 자세를 낮추었다. 심지어는 그는 승전자의 영예로 주어지는 개선식마저 마다하고 자신의 일을 조용히 해 나갔다. 아마도 아그리파는 절대권력자 밑에서 2인자가 살아남는 방법을 일찍이 터득한 모양이다.
절대권력자, 동서고금 막론하고 2인자를 두지 않는다동서고금을 통해서 절대권력자는 자신을 넘보는 2인자를 두지 않았다. 1인자로선 2인자가 자칫하면 딴 맘을 먹지 않을까 불안감을 갖기에 보통 2인자라 지칭되는 사람의 말로는 비참한 것이었다. 우리 역사를 보라. 박정희 정권하에서 2인자들의 말로가 어떠했는가. 박정희 1인 절대권력 밑에 몇몇 권력자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권력을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트릴 만하다고 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나 경호실장이 그런 권력자들이었다. 김종필, 김형욱, 박종규, 이후락, 차지철, 김재규 등등… 이들에겐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권력이 허락되었으나 그것은 일장춘몽과 같은 것이었다. 박정희는 이들에게 결코 항구적인 권력을 허락하지 않았다. 항상 충성경쟁을 시켰고, 어떤 상황이 되면 여지없이 칼을 뽑아 잠시 허락했던 권력을 회수했다.
김형욱의 경우 중정부장으로 권력을 즐겼지만, 그도 언젠가부터 박정희의 눈 밖에 들더니만 이 땅을 조용히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인생이 되었다.
이런 예는 비단 우리만의 역사가 아니다. 최근 북한에서 일어난 사태, 장성택 사건을 보면 다시 한 번 절대권력자 밑의 2인자가 얼마나 위험한 살얼음판을 걷는 권력자인지를 알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후 누가 보아도 명실상부한 2인자라 여겨지던 장성택이 어느 날 갑자기 숙청되어 처형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그게 바로 2인자들의 운명이다.
아그리파, 2인자의 덕성을 가졌나그럼 아그리파가 본질적으로 1인자의 총애를 받는 2인자에 적합한 덕성을 가진 자였을까. 2인자로서 어떻게 처신하면 절대권력자로부터 신임을 받아 그 생명을 롱런할 수 있을지 그는 제대로 알았다는 말인가. 아마도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도 개인적으로는 야망도 있고 미래를 도모할 능력도 있었지만, 자신이 아우구스투스의 충실한 2인자로 남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았다는 것이다. 로널드 사임은 아그리파에 대하여 이런 인물평을 내놓는다.
"…아그리파는 로마인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야망을 다 갖고 있었다. 그가 명예 수여를 거부한 것은 겸손하여 주제 넘게 나서지 않는다고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응집된 야망, 실제 권력에 대한 한결 같은 열정의 표시, 꾸밈과 평판에 개의치 않는다는 표시이다. 아그리파의 본성은 고집이 세고 오만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에게는 굴복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굴복하지 않았으며 아우구스투스에게도 언제나 기꺼이 굴복하려 하지는 않았다." (로마혁명사 1권, 491쪽)한편, 아그리파는 군사적 차원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절대적 참모였지만 로마를 제국의 수도답게 꾸민 장본인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 이전의 로마는 성장하는 도시였지만 최고의 도시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 재위 기간 로마는 인구 1백만 명이 살아가는 세계 최대의 도시가 되었고, 거기에 걸맞는 기반시설이 갖추어졌다. 도로가 정비되었고, 수로를 통해 들어 오는 맑은 물은 로마 시내 어디서든 콸콸 쏟아졌다. 대리석으로 다듬어진 신전과 공회당, 그리고 시장이 여기 저기에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