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선 빚는 안보 사령탑24일자 <조선일보>는 남재준 국정원장이 2015년 통일 가능성을 언급했다고 보도했다.
조선닷컴
"우리 조국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통일시키기 위해 다 같이 죽자. 한 점도 거리낌 없이 다 같이 죽자."(남재준 국가정보원장)
"전쟁은 언제 한다고 광고를 내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고, 싸움준비 완성에 최대의 박차를 가해야 한다."(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전쟁 출정식'을 방불케 한 국정원장의 송년 축배
'극(극우)과 극(극좌)은 서로 통한다'는 가설이 이번에도 현실에서 적용되는 모양이다. 프란시스코 교황은 성탄절에 취임 후 첫 강복 메시지 '우르비 에트 오르비(Urbi et Orbi, 로마와 전세계에 보내는)'를 통해 아프리카 남수단과 시리아 등 분쟁 지역의 평화를 기원했지만,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서는 '이 땅에 평화' 대신 '이 땅에 전쟁'을 앞세웠다.
교황은 "매일 우리의 삶에서, 우리 가족 안에서, 우리 도시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스스로 평화중재자가 될 수 있게 해달라고 신에게 요청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21세기에도 여전히 지구상에서 마지막 '냉전의 섬'으로 남아있는 한반도의 남쪽과 북한에선 성탄절에 '출정식'을 방불케 하는 '송년 축배'를 들었다.
남재준 국정원장은 21일 간부 송년회에서 "2015년에는 자유 대한민국 체제로 조국이 통일돼 있을 것"이라면서 "우리 조국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통일시키기 위해 다 같이 죽자"고 했다고 한다. 24일자 <조선일보> 보도다. 이는 북한에 대한 무력통일을 암시한다. 한 송년회 참석자는 이 신문에 "조국 통일 달성을 결의하는 자리였다"면서 "국가 보안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조국 통일을 위한 '구체적 플랜'도 논의했다"고 밝혔다.
'국가 보안이라 말할 수는 없다'고 전제했다시피, 정보기관에서 개입할 수 있는 '구체적 플랜'이란 결국,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비한, 또는 급변사태를 일으키는 비밀공작을 의미한다. 비밀공작의 대표적 유형은 적대국을 대상으로 정치적,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모략 및 와해공작'이다. 이는 적대국 핵심 인사에 대한 모략이나 테러, 주요 시설 및 장비에 대한 사보타지, 적대국 내부의 혼란이나 이간 조성, 중요한 무기나 기술 확보 저지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와해공작에는 다양한 수단이 동원되는데 냉전 시기에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와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이 중남미와 아프리카에서 적대국 내부교란을 위해 반정부 세력이나 게릴라 집단을 지원한 것이 가장 빈번했던 사례다. 아직까지 내전을 겪고 있는 아프리카 나라들의 내분은 뿌리깊은 종족 갈등 탓도 있지만, 대부분 냉전 시기 KGB와 CIA 비밀공작의 유산이다.
북한 급변사태 대비한 국정원의 '고당계획'그래서 섬뜩하다. 이 대목에서 지난해 11월 <신동아>가 입수해 보도한 'DJ정부 북 급변사태 대비 비밀문서'가 떠오른다. 이에 따르면, 국정원은 북한에 쿠데타나 그에 준하는 급변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위기관리-통일추진-실질통합의 3단계로 나누어 단계별 상황을 설명하고 그 대책을 밝히고 있다. 이를테면 위기관리 단계에서는 김정일의 해외 망명정부 수립을 허용하지 않는 데 주력하고, "북한에서 개혁 정권을 출범시키는 단계"인 통일추진 단계에서 국정원은 '고당계획'(조만식 선생의 호를 딴 북한정권 붕괴시 한국 주도로 비상통치를 하는 데 필요한 행정조치 계획)을 개시하는 것으로 돼 있다.
이에 따르면 국정원은 원장 직속으로 편제된 '북한지역 평정 합동대책반'의 정보·수사·보안·대북 요원들을 파견해 북한에 심어놓은 우리 공작망(부식첩망)과 탈북자, 한국에 협조하는 북한 주민 등을 활용해 당·정·군의 핵심 통일저항세력을 분류 선정해 제거하거나 격리 체포 수감하도록 돼 있다. 특히 인민무력부와 호위사령부, 평양방어사령부 등 군부 핵심 저항세력을 적극 장악하게 돼 있다.
마지막 단계인 "실질통합 단계에서는 정부가 '노동당 불법화'를 선언하고 정부대책반으로 하여금 노동당을 접수케 한다"고 한 뒤 "'노동당 처리 특별법' 등을 만들어 적법한 절차에 따라 노동당을 해산하고 노동당의 재산은 국유화한다"고 되어 있다. 이쯤 되면 국정원은 정보기관이 아니라 '혁명사령부' 같은 초법적 기관이다. 이같은 혁명적 상황에서 한반도 안보의 핵심 변수인 미국과 중국의 역할과 그에 대한 대비책이 없다는 점이 이 문건의 취약점이긴 하다.
그럼에도 이 문건은 위기관리 단계에서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에서도 "남파간첩 출신, 사회주의 지하혁명조직 구성원, 친북·좌익 이념단체의 인물, 재야·노동운동단체의 핵심 인물, 북한 공작조직과 연계혐의가 있는 내사와 수사·공작 대상자 등은 경찰·검찰·기무사와 함께 특별 관리한다"고 돼 있다. 또 "국내의 대공위해(對共危害) 인물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통일 방해세력 관리지침'(가칭)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고 돼 있다. 통합진보당의 이른바 이석기파 비밀회동에서 전시 '예비검속'에 대한 우려가 표출된 것은 상당한 근거가 있는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남재준 원장은 아직도 자신이 육군 참모총장인줄로 착각하는 것 같다. 야전군 지휘관이라면 송년회에서 이런 발언도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으로서 해서는 안될 말이다. 더구나 간부 송년회에서 한 발언이 보수언론에 보도된 것을 보면, 남 원장의 대북 대결 조장 발언이 국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국정원 개혁의 '물타기'나 철도노조 민영화 반대 파업 국면의 여론 기만용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혼선은 북한에 잘못된 '신호' 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