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홉살인생>에서의 한 장면.
시네마서비스
아이와 함께 놀이터에 가는 일이 일상인지라 그 다음부터는 그 아이가 눈에 자주 들어왔다. 그 아이는 또래 동생들보다 몸집도 커서 매번 같이 놀다보면 어린 아이들을 괴롭히는 형국이 되곤 했다.
가만히 보니 이 아이는 동생들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곳에서 놀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었으나, 동생들을 돌보기에는 아직 어렸다. 게다가 동생들 또래 애들과 놀기에는 너무 차이가 나서 종종 문제를 일으켰고, 이미 동네에서는 다른 부모들의 경계 대상이 되곤 했다. 사정을 알고 나서는 그 아이에게 먼저 말도 걸고 인사도 하고 종종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자연히 그 아이도 나와 내 아들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때론 친동생들과 더불어 내 아이를 챙겨주기까지 했다(역시 아이들이란!).
이것도 투사라면 투사라고 해야 하나. 그 아이를 보면서 내 유년기·청소년기의 어두운 기억들을 떠올려 봤다. 그리고 사회에서, 작게는 한 마을에서 쉽게 유년기의 아이를 향해 규정짓는 선입관들이 그 아이를 고립시키고 더 문제아로 만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보다 더 어른들의 눈치를 보면서 크는 요즘 아이들의 성숙한 표정들을 대할 때마다 무슨 이유인지 마음 한편이 못내 불편하기만 하다.
우리는 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의 아이를 벌써부터 '악의 축'으로 규정짓는 건 아닌지. 내 아이에게 해대는 못된 행동에 대해 그대로 갚아주고 싶은 마음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까지 미치고 보니, 이것이 부시 정권의 반테러 정책과 다를 게 없다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허허.
내 아이의 행복? 다른 아이에게서도 나온다
흥미롭게도 내 아이도 자기보다 어린 동생들에게 때때로 과격한 행동을 한다. 불합리한 놀이의 룰을 강요해서 동네의 다른 동생들을 힘들게 만들면서 은근히 쾌감을 느끼기도 하고 서로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동생들을 때리기도 한다. 그럴 때는 가서 말리기도 하지만 놀이터의 권력구도에서 내 아이가 '갑'일 때는, 솔직히 고백하긴 창피하지만 '애들이 같이 놀다보면 때리기도 하고 맞기도 하는 거지'라는 다소 여유로운 마음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지 놀이터에서 아이들끼리 싸울 때 피해를 입은 쪽의 부모가 서운함이 커져서 생기는 갈등을 종종 본다. 제3자의 입장에서 양쪽 부모의 스탠스가 모두 나에게도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런 걸 보면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서 부모는 다 자기 새끼를 감싸고 도는 원초적 본능이 있는 것도 같다.
요즘 자주 회자되는 말 중에 '지속가능한'(sustainable)이란 용어가 유행이다. 환경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성장을 담보하는 어떤 방향을 지칭하는 의미로 자주 쓰인다. 'OO 생태계'라는 말도 비슷한 의미로 자주 쓰이고 있는데 어떤 사안·전략·개별 주체 하나만 잘 돼서는 큰 효과를 내기 힘들고, 근본적으로는 그 주변 인프라가 잘 갖춰져야만 시너지 내지는 지속적인 발전이 이뤄진다는 반성에서부터 기인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