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과 독립문
이홍로
파리 개선문에서 발현된 민족주의는 우리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가면 서대문 독립공원이 있다. 이곳엔 일제강점기 우리 독립투사들이 고문받고 죽어간 서대문형무소와 함께 우뚝 서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독립문이다. 우리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독립문이 어떻게 여기에 세워져 있는지 알 것이다.
이 독립문은 1896년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조 500년 동안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세운 문으로 세계사적으로 볼 때 19세기를 풍미한 민족주의의 우리 식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독립문은 현재 위치에서 남동쪽으로 약 70m 떨어진 지점에 있었는데 1979년 성산대교 공사로 인해 이전한 뒤 복원해 놓은 것이다.
바로 이 독립문은 독립협회를 이끈 서재필이 스스로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당시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 기사가 설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건축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이야기는 자료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나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독립문을 만듦에 있어 서재필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 독립문이 파리 개선문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미적 관점에서는 보잘것없다. 개선문 양식으로 이 문을 만들려고 했다면 서구 개선문의 기본 양식을 제대로 가져왔어야 했는데 엉성하기 그지없다. 개선문의 기본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아치 위의 상단 부분(attic)마저 거의 생략되어 있다.
서양 개선문에서는 이 상단 부분에 통상 그 문이 언제, 누구에 의해, 왜 만들어졌는지가 간단히 기록되는 곳으로 양식상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또한 개선문에는 그 개선문의 목적과 관련된 각종 예술적 장식물(부조)이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 독립문에는 이런 것은 모두 생략되고 화강석을 쌓은 다음 앞뒤 현판석에 독립문이라는 글자를 한글과 한자로 써 놓고 양옆에 태극 문양을 그려 넣은 것이 사실상 장식의 전부이다.
나는 이 독립문을 보면 1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독립협회의 중심인물 서재필을 생각한다. 과연 그는 이 독립문을 구상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것을 알려면 그의 이력을 알아야 한다. 그는 참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의 젊은이 중에서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서재필에 대한 정보는 그의 자서전이나 근현대사 역사책에 비교적 자세히 나오니 관심 있는 독자들은 그것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여기서는 나의 상상과 관련된 부분만 들추어 내 이 독립문을 만드는 과정을 추적해 보기로 하자.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서재필은 어린 시절부터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한양에 올라와 당시 최고 지식인들과 교유한다. 초기 개화파의 핵심인물인 서광범은 5촌 당숙이었고, 개화파의 지도자인 김옥균과도 깊이 교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서재필은 나이 스무 살이 되는 해인 1884년에 이들 개화파의 지도자들과 함께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 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그 주모자들은 반역자로 몰려 조국을 등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서재필은 우여곡절 끝에 1885년 일본을 통해 미국으로 망명한다. 아마도 서재필은 조선인으로서는 1883년 보빙사로 간 민영익 일행(여기에 유길준이 포함되어 있었다)을 제외하고는 두 번째로 미국 땅을 밟은 사람일 것이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뛰어난 적응력을 보인다. 매우 뛰어난 머리를 가진 조선의 지식인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한 채 미국에 갔지만 나이 스물을 갓 넘긴 조선의 영재는 빠른 속도로 영어를 마스터하고 급기야는 의대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고 모교인 조지 워싱턴 대학 의과대학(당시 컬럼비아 의과대학)의 강사가 된다. 물론 이 사이에 미국 여자와 결혼도 했다. 서재필이 이렇게 미국 사회에서 학교를 나오고 미국인과 결혼까지 한 것은 다시는 조선 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는 체념이 깔렸었기 때문이었다. 갑신정변으로 처자식이 다 죽고 집안은 풍비박산된 상황에서 고국에 간들 무슨 희망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미국에서 십년 세월을 보내는 동안 조선은 급변하고 있었다.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다시 권력의 전면에 나서는 상황에서 서재필은 조국을 떠난 지 12년 만에 조선 땅을 다시 밟는다. 그렇게 해서 만든 것이 독립협회. 12년 동안 서재필은 미국에서 단지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된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의 영민한 청년은 서구 문명의 그 심장부에서 끝없이 발전하는 서구문명의 실체를 보고 매일 같이 놀라면서 그것을 배워나갔을 것이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이 끝난 다음 질풍노도와 같이 빠른 속도로 산업사회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서재필은 미국의 산업혁명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독립한 지 100년 만에 세계 정상급 대국으로 발전하는 미국에서 무엇인가 큰 깨달음을 했을 것이다.
이런 경력의 서재필이 국내로 돌아와 아직도 서구 문명의 실체를 모르고 정쟁을 일삼는 권력층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직도 미몽에서 깨지 못하고 살아가는 조선 민중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거기서 그는 계몽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독립신문을 만들어 직접 논설을 쓰면서 우리가 빨리 서구문명을 받아들이지 안 됨을 호소한 것은 그의 이력에 비추어 자연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글만으로는 계몽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일반 대중이 매일 같이 지나다니는 대로에 큰 기념물을 만들어 계몽하는 것, 그것은 12년간의 외국 생활을 통해 배운 매우 익숙한 방법이었다. 이즈음 그의 머리에선 미국에서 알게 된 파리 개선문이 생각났을 것이다. 19세기 후반 서구 세계는 민족주의와 식민지 쟁탈전이 한창이었다. 이 과정에서 각 국가는 자신들의 힘과 영광을 보여 주기 위해 수도 한복판에 거대한 개선문을 만들었다. 서재필도 그것을 알았다. "그래, 우리도 그런 것을 만들어 보자" 서재필은 그렇게 외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