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행 비자1975년 4월 21일에 발급된 비자는 12월 21일까지 유효했지만, 베트남전이 1975년 4월 30일에 종전되면서 비자는 쓸모가 없어졌다.
고기복
당시 미군은 이미 단계적인 철수 작전을 입안하고 군사 고문, 외교관, 거류민, 동맹국 국민, 월남 핵심 지도층을 탈출시킬 계획을 진행 중에 있었다. 아빠는 그 계획에 앞서 캄보디아로 가면서 자신이 돌아온 후 온 가족이 함께 움직여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부패한 월남군은 중부 베트남이 함락된 후 순식간에 무너지며, 사이공마저 금세 내주고 말았다. 온 가족이 비자를 발급받은 지 열흘도 채 지나지 않은 4월 30일 새벽이었다.
사이공이 함락되고 전쟁이 끝나던 날부터 미군이나 미 군속을 가족으로 둔 베트남인들은 고국을 탈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와 함께 보트를 타고 떠났던 누구누구가 물귀신이 되었다든가, 공산당에 붙잡혀 처형되었다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자자했다.
엄마는 생때같은 자식 다섯을 두고 갈등하기 시작했다. 돌아오겠다던 남편을 기다리고 싶어도, 남편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적국 기업의 관리자다. 엄마는 남편 소식을 수소문하려 해도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보트를 타고 베트남을 벗어나고 싶어도 어린 아이 다섯이나 데리고 움직이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소식이 끊긴 남편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도 않았다. 결국 베트남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엄마의 결정은 남은 가족에게 너무나 험난한 결과를 가져왔다. 세상이 바뀌었고, 바뀐 세상에서 살아가기에는 '적국'의 아내요, 자식이라는 멍에는 녹록한 게 아니었다. 공산당은 교화를 이유로 미군이나 미 군속과 관계를 맺고 있던 모든 사람들을 '미제국주의의 앞잡이요, 공민권 행사를 할 자격이 없는 반동'으로 몰며 강제 수용했다. 강제 수용을 피한 사람들은 신분을 속이기 위해 고향을 떠나야 했다.
숙청과 교화라는 명목의 핍박은 아이들이 학교에 다녀야 할 시기가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
로안씨는 자라면서 겪고, 보았던 자신을 비롯한 엄마와 형제자매들의 고생에 대해 굳이 말하려 들지 않았다. 다만 엄마가 할머니 댁의 도움으로 아이들을 돌보면서 매일 같이 세상이 바뀌어 아빠를 만날 수 있기만을 염원해야 했었다는 정도만 이야기한다 - 기자 말).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변한 게 없어세상이 바뀔 징조는 1986년에 보이기 시작했다. 베트남 공산당이 당 대회에서 사회주의의 기초골격은 유지하면서 자본주의를 접목시키려는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모이'를 선언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1993년 한국과 베트남 공식 수교가 이뤄지면서 아빠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한껏 부풀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상처만 안겨주었다. 주 베트남 대한민국 대사관을 통해 아빠 소식을 수소문하며 국적회복신청을 시도했지만, 정보가 정확치 않다며 빈축만 샀다. 대사관에서 엄마와 다섯 오누이는 행여 '라이 따이한'이라는 핑계로 한국에 가려고 하는 사람 취급을 받으며 모멸감을 느껴야 했다.
아빠에 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세 가지다. 아빠 사진이 부착된 미국 법인 회사의 동남아시아 지역 관리자 카드에는 아빠 이름과 회사 직위가 적혀 있다. 집합장소에 모여 미군 철수 계획에 따라 철수할 대상임을 확인하는 주월 한국대사관 발행 확인증에는 남 1, 여 5명으로 로안씨 아버지가 동반할 가족 수가 적혀 있다. 마지막으로 엄마와 다섯 아이의 사진이 부착되어 있는 비자로 생년월일과 이름이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