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sxc
"짐은 다 싸 놨지?"
"응. 음… 싸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배낭 주위에 물건들을 늘어놨기 때문에 차곡차곡 주워 담기만 하면 돼."
더스틴의 마지막 짐을 챙기고 배낭을 꾸려서 내 짐을 정리해 놓은 부모님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춥고 인터넷도 안 되던 이대의 골방과도 이젠 작별이다. 준비성이 심각하게 없는 나의 성격을 무척 잘 아는 까닭에, 더스틴은 내 대답을 듣고도 전혀 미덥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준비성이 없는 나라지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장기 여행인 만큼 나 나름대로 배낭 꾸리기에 대한 전략을 짜보았다. 간간이 들여다보던 여행자 커뮤니티에는 배낭싸기에 대한 여행 고수들의 충고들이 넘쳐 흘렀다.
충고① : "여자라면 인도에 가더라도 멋진 드레스 한 벌과 구두 한켤레 정도는 가지고 가야 해요. 디너 파티에 초대 받을 때를 대비해서요."음…. 신데렐라 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이라면 모를까, 서울에서도 평생 없던 이벤트가 인도까지 가서 생길 일은 없을 것 같다. 혹여라 있더라도 가서 사면 되지. 이건 탈락.
충고② : "6개월 이상 여행이라면 아무리 체구가 작은 여자라도 50L 용량 이상의 가방은 메야 해요. 나갈 때 다 안 채우고 간다고 해도, 들어올 때 선물 가지고 들어올 걸 생각해야 하거든요." 큰 용량의 배낭이 필요하다는 점은 스포츠 용품 매장의 직원도 강조하는 바였다.
"여행을 얼마나 오래 가시는데요. 네? 6개월 이상이요? 어휴. 한 달 이상만 가도 60L 이상은 필요해요."
매장 직원이 장기 여행을 가보고 하는 소리인지에 대해서는 증명할 길이 전혀 없으나, 일단은 50L 배낭을 착용해 봤다. 체구가 작은지라 내가 배낭을 맨 건지 배낭이 나를 맨 건지 모를 꼴이다. 어차피 나는 내일 일은 내일로 미루고, 내일 걱정은 나중에 하는 미래지향적 인간이 아니던가. 한 치 앞을 모르는 여행길에 한국에 돌아올 일까지 걱정하여 50L짜리 배낭을 매일같이 매고 다닐 순 없다. 탈락.
모아놓은 물건을 배낭에 넣기만 하면 됐는데...충고③ : "일단 아웃도어 매장에 가서 마음에 드는 배낭을 하나 사세요. 그리고 필요할 것 같은 짐을 몽땅 주위에 늘어놓는 거죠. 처음에는 소주도 한 5병 싸고, 목베개 같은 것도 싸고…. 그런데 다 넣고 배낭을 메면, '이걸 정말 다 이렇게 들고 다닐 자신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죠. 그럼 하나씩 빼는 거예요. 마음도 비우고, 짐도 비우는 거죠. 이걸 한 일주일정도 반복하다 보면, 내 여행에 꼭 맞는 초정예의 배낭이 완성되게 됩니다!" 매우 설득력 있어 보이는 이론이었다. 떠나기 1주 전, 더스틴과 나는 아웃도어 매장에 가서 고대하던 35L 짜리 배낭을 샀다. 하지만 그 고수의 충고를 받아 들이기엔 이미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있었다. 배낭이 너무 큰 것 같아 교환. 무거운 것 같아 교환. 이리 교환을 몇 차례 하다보니, 내 것이다 싶은 배낭을 손에 쥐었을 때에는 짐싸기를 위해 주어진 시간이 고작 이틀 남아 있었다. 나는 일단 급한대로 필요할 것 같은 짐을 방 한 구석에 모아두었다. 더스틴의 마지막 짐을 정리하고, 이대 골방을 떠나 내 짐을 모아놓은 엄마집에 도착했다.
"어제 내가 빨아서 옥상에 말려놓은 스포츠 타월있잖아, 어디있어?"그 많던 시간은 다 어디로 가버린걸까. 3개월, 한 달, 1주일, 항상 충분히 남아있을 줄만 알았던 출발 시간은 흐르고 흘러 3시간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어쩌랴. 뭐라도 들고 가야지. 패닉상태의 나는 '내가 챙겨놓은 잡동사니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알리가 없는 엄마에게 다짜고짜 따졌다.
배낭 주위에 잘 모아놓은 물건을 집어넣기만 하면 되는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걸까. 더스틴 엄마가 보내준 초록색 수첩은 꼭 가지고 가고 싶었는데. 수건으로 발까지 닦아버리는 더스틴이랑 수건을 같이 쓰는 일만은 피하고 싶은데.
"Suji, I thought you were all packed!(짐 다 쌌다며!)" "I did! I just had to pack them in the backpack!(그래! 가방에 집어 넣기만 하면 됐었다고!)""배낭에 짐을 싼다는게 무슨 뜻인지 몰라? 배낭 주위에 물건을 둔다는 게 아니고, 배낭 안에, 이 안에 물건들을 다 집어넣는 것이 배낭을 싼다는 의미라고!" 이런식이라면 고수들의 배낭 싸기 이론은 다 헛것이었다. 아무도 나에게, 적어도 여행 가기 전날에는 배낭 안에 물건들을 모두 넣어 놓는 것을 잊지 말라는 그런 충고는 해주지 않았단 말이다.
나를, 불타는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던 더스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