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4일 오후 국정원이 국회 정보위 여야 의원들에게 공개하기 위해 제작한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사본의 표지.
권우성
공명선거와 국가기관의 정치 행동 금지민주주의의 기본은 국민이 선거를 통해 통치기구를 구성하고, 통치기구의 절대 권력화를 막기 위해 권력 분리와 견제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 제도의 꽃인 선거의 공정한 수행을 위해 국정원을 비롯한 일부 국가 기관에 대해 정치 개입 및 정파적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본이 위배된 것이다. 그것도 국가의 최고 기관들과 거기에 몸담은 정치 엘리트들의 조직적 담합에 의해.
국가정보원의 웹사이트(
http://www.nis.go.kr)에 따르면 "국가정보원은 국가 안보와 국익 증진을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이며 "안보와 국익을 저해하는 어떠한 위협에도 대한민국이 세계일류국가로 도약할 수 있도록" 일하는 기관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 안보를 위한 정보 수집에 집중해야 할 국정원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불법적 행동을 일삼았고, 이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문제의 핵심은 국정원의 선거 개입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의 공개라는 두 가지 사건이다. 먼저 사실관계부터 정리해 보자.
# 사건 1. 국정원이 선거에 조직적으로 개입했다. 2010년 지방 선거를 앞두고 당시 국정원 원장 원세훈은 내부 인트라넷에 "지방선거에서 좌파들과 확실한 싸움을 해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경향신문 6월 28일 보도). 국정원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 선거 전후 박원순 (현) 서울 시장에 대한 사찰을 했다.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정원 요원 9명이 5천 건 이상의 인터넷 댓글 달기를 하면서 선거 여론을 조작했다(국정원 여직원 사건). 선거 개입을 지시한 혐의로 원세훈 국정원 전 원장이 기소된 상태이다. 국정원 선거 개입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본인은 아는 바가 없다고 대응했다.# 사건2. 국정원이 2007년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했다. 국정원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의 판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원문을 왜곡 짜깁기한) 발췌 본을 제작하여 2010년에는 청와대에 제공했고, 2013년 1월에는 검찰에 제공했다. 같은 발췌 본을 2013년 6월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이 열람하도록 했다. 문제가 되자 정상회담 회의록 전체를 정보위원회 국회의원들과 언론에 배포했다. 그리고 국정원의 권한 밖의 일임에도 정상회담 회의록을 대통령 지정 기록물에서 일반 기록물로 재분류했다.문제의 본질은 국가기관의 정치 중립 위반정상회담 회의록은 수십 년 정도 비공개하는 것이 외교가의 관례라고 한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대통령 기록물법에 따라 대통령 지정 기록 관리물로 분리되어 있어 적법한 절차 없이 공개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다(2013년 6월 25일 기록관리 전문가 단체 기자 회견문). 기록물의 분류를 변경하는 것도 국정원의 권한이 아니다.
국정원이 벌인 사건 1과 사건 2의 핵심은 정치적 중립을 벗어난 행위를 했다는 것, 그것도 법을 어기면서 행했다는 것이다. 선거 기간 중 일상적으로 하는 정보 수집 행위였다는 주장이나, 고 노무현 대통령이 북방한계선 (NLL)에 대해 특정 발언을 했다는 주장 등은 문제의 핵심이 전혀 아니다.
국민이 국가정보원의 선거 개입과 대통령 기록물의 불법적 공개를 지켜보면서 분노하는 이유는 민주주의 하에서 지켜져야 할 기본 절차가 위반되었기 때문이다. 2008년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 때도 비교적 참여가 적었던 대학생들이 이번에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촛불 시위에 참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러져야 할 선거에 국가의 정보 기관이 개입했다. 이런 일은 박정희, 전두환 치하 독재 시대에나 있던 일이다. 1987년 이후 민주적 선거 26년의 경험이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것도 국정원이라는 조직의 일부가 우연히 벌인 일이 아니다. 국정원의 수뇌부가 주도해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선거에 개입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국정원이 단독적으로 벌인 일로 보이지도 않는다. 새누리당 정치인들과 검찰 수뇌부의 이름들이 함께 거론되고 있다.
여기에 사건 1과 2을 연결하는 핵심적 사건 3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생긴다.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새누리당 정치인들과 검찰, 국정원의 수뇌부가 서로 계획적으로 모의하고 공조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모의하고 공조한 것이 인터넷 댓글 달기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불법 누설이 전부일까? 그들이 그런 사이라면 과연 검찰은 원세훈 전 원장의 범죄 사실을 샅샅이 조사하고 법의 심판을 받게 할 수 있을까? 현재 진행형인 국정원의 정상회담 회의록 불법 배포는 과연 누가 조사하고 처벌할 수 있을까?
불안한 한국의 민주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