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밭사과밭이 많다.
강은경
아무튼 그날 동네에 예순 두 장의 수건을 돌렸다. 웬 수건 돌리기? 돌잔치나 칠순잔치의 답례품을 돌리는 것도 아니고, 무슨 유세를 하는 것도 아니고, 영업집 개업 홍보용도 아닌데. 그리된 사정은 이러했다.
그 전날 고흥에 사는 고모님이 오셨다. 한 마디 언질도 없이 갑자기 서울생활 정리하고 지리산자락으로 이사 온 조카 집을 부리나케 찾아오신 거였다. 이것저것 바리바리 챙겨 들고. 수박, 감자, 양파, 마늘, 휴지, 세제… 그리고 수건 팔십 장.
"이사떡을 돌려야겠지만 날이 이리도 더우니 음식은 좀…. 생각 끝에 수건 맞춰왔다. 이렇게라도 동네 분들께 인사드리는 게 좋겠다."
당장 앞장서 동네를 도시겠단다. 고모님은 그 씩씩한 목소리로 우리 조카 잘 부탁한다는 말 끝에, 실상은 변변치 못한 인사(人士)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은근슬쩍 조카를 치켜세워 소개할 심사였다. 조카사랑을 조카자랑으로 펼칠 판이었다. 앗, 생각만 해도 낯뜨거웠다.
게다가 나는 어떤 경우로든 동네에서 소란 떨며 존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눈에 띄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 저 사람과 깊게 얽히고설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툇마루에 걸터앉아 지리산 자락과 하늘을 바라보며 음전하게 살고 싶었다. 있는 듯 없는 듯. 나날이 산골의 적막한 맛을 조용히 음미하고 싶었다. 길에서 마주치는 어르신들께 예의 바른 인사 정도나 꼬박꼬박 챙기면서. 내겐 고요하고 고독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 고모님을 주저앉혀야 했다.
"지금 다들 일 나가고 집이 다 비었을 텐데… 나중에 제가 할게요."강한 어조로. 고모님은 끝내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떠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