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좀처럼 보기 힘든 검은 다이얼 전화기와 교환대. 전화가 오면 각 집에 해당하는 곳에 선으로 된 잭을 꽂아 전화를 연결하는 낡은 교환대는 이 다방이 예전 마을의 모든 전화와 소식을 총괄했던 지휘소였음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김종길
올해 마흔인 큰딸이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전교생이 450명이었던 득량중학교는 이제 전교생이 25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발소도, 다방도 손님이 줄어든 건 당연지사. 득량면에는 12개 리와 8구의 마을이 있어 전에는 면사무소에서 회의가 10시에 있을라치면 8시쯤에 사람들이 와서 차 한 잔 하고 가곤 했을 정도로 다방은 아침부터 손님이 들끓었다.
그러나 몇 년 전 국도 2호선 공사가 시작되고 4차선으로 우회도로가 나면서 손님이 뜸해지더니 종국에는 찾는 이조차 손꼽을 정도가 되었다. 예전에는 이곳 역 주위에만 은하수, 오봉, 역전, 선정, 유정, 행운 등 여섯 개의 다방이 있었는데, 한 곳은 노래방으로 다른 한 곳은 호프집으로 바뀌고 나머지는 사라졌다. 다방으로 온전히 남은 곳은 이곳 행운 다방뿐이다.
다방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도 따가웠다. 특히 딸이 셋이다 보니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에 남모를 가슴앓이도 많이 했는데 직업에 귀천이 없고 착하고 열심히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여태까지 꿋꿋하게 살아왔다. 딸의 상견례 때 아빠는 이발사, 엄마는 다방을 한다는 게 못내 맘에 걸렸는데 다행히 사돈댁에서 이해해줘 무척이나 고마웠다고 했다.
고향 이야기 나오자 이내 눈물이 글썽셋째를 임신했을 때 딸 둘을 낳고 죄스런 마음에 보따리까지 싸놓고 있었다. 그런 고된 마음고생에 몸무게가 44kg까지 빠졌는데 살이 달라붙어 뼈밖에 남지 않았다. 다행히 셋째는 아들이었다. "달고만 나와도 이쁜데, 참 이쁘게도 생겼어" 하며 기뻐하던 시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집안은 잔치 분위기였고 시아버지는 아들을 낳아준 며느리를 위해 손수 일주일 동안 세 끼 미역국을 꼬박 챙겨줬다. 항시 며느리가 옆에 있어야 할 정도로 시아버지의 며느리 사랑은 각별했다. 시아버지는 82세 때 고인이 되었고 시어머니는 92세로 아직 모시고 있다.
17살 때 가족이 보성군 득량으로 이사 오고 난 후 최씨가 고향인 추자도를 찾은 것은 9년 전이었다. 추자도에 있던 사촌오빠가 돌아갔을 때였다. 고향을 떠난 지 무려 38년 만이었다. 고향 이야기에 최씨의 낯빛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으로 예전 여행자가 쓴 추자도 글과 사진을 보여주자 함박웃음을 짓더니 금세 눈물을 글썽인다. "으메, 어쩔 거나! 아! 다무래미, 묵리고개, 대서리, 영흥리, 여기가 나 고향이여. 푸랭이를 종종 가기도 했어. 상추자도, 하추자도. 아직도 눈에 선한디…" 깊은 한숨이 묵직한 다방의 공기를 뚫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