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 때 48시간 동안 미군과 혈전을 벌인 광성보. 광성보는 인천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조선시대 해안방어기지다.
김종성
아버지의 시대를 청산하고 자기의 시대를 열어야 했던 고종은,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 논문을 매우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미국 등 서양열강을 끌어들여 한반도 정세를 바꾸는 방법으로 정국 주도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정국 구상을 정당화하는 데에 <조선책략>을 활용했다.
이런 의도 하에서 고종은 1880년부터 <조선책략>을 꽤 적극적으로 유포시켰다. 그가 대신들과의 접촉이나 어전회의 등을 이 논문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점은 고종 17년 9월 8일자(1880년 10월 11일) <고종실록>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정부 차원에서 미국에 대한 동경심을 확산시키는 현상이 나타났다. 경제적으로 발달한 미국 같은 나라와 제휴해야 조선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는 인식이 위에서 아래로 번져 나간 것이다.
미국에 대한 동경심이 확산되는 분위기 속에서 1882년부터 미국을 포함한 서양열강이 조선 시장에 진출했다. 물론 경상도 선비들이 <영남 만인소>란 상소를 올려 시장개방을 반대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에 대한 당시의 동경심은 전 국민적 차원의 것은 아니었다. 정부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확산되는 감정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미국에 대한 동경심은 실망감과 중첩되기 시작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미국은 '조선이 시장을 개방하면, 향후 조선이 어려울 때에 적극 돕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조약 제1조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미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일례로, 1882년 하반기부터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또 1894년에 동학농민군을 진압할 목적으로 들어온 일본군이 조선 무대에서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려 하자, 조선은 조약 제1조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은 번번이 조선을 외면했다.
급기야 미국은 1905년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의 조선 지배를 후원하기까지 했다.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지지하는 대신,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지지하기로 한 것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1924년에 공개됐지만, 1882년 이후와 1894년 이후의 경험 때문에, 조선에서는 미국에 대한 동경심과 함께 실망감도 형성됐다.
하지만, 구한말에는 일본·청나라·러시아에 대한 반감 내지는 분노가 훨씬 더 컸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실망감은 크게 증폭되지 못했다. 그래서 1880년대 이후로는 미국에 대한 동경심이 우세한 가운데 실망감이 다소 표출되는 양상으로 미국에 대한 감정이 형성됐다.
이런 상태로 한민족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 1945년 해방을 맞이했다. 따라서 해방 직전까지의 한민족은 무시·자신감·실망감이 의식 저변에 미미하게 존재하는 상태에서 동경심으로 미국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