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장. 복원작업이 진행되던 지난 1월 5일에 찍은 사진.
김종성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에서 왼쪽으로 10분 내지 15분 거리. 이곳에는 그간의 복원작업을 거쳐 지난 2일 개방된 경교장이란 2층 건물이 있다. 여기는 백범 김구가 1945년 11월 23일부터 1949년 6월 26일까지 거주했던 곳이다.
이곳의 원래 명칭은 죽첨장이었다. 일제시대에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김세연이 설계하고 자산가인 최창학이 소유했던, 당시로써는 꽤 호화스러웠던 건물이다. 김구는 일본식 이름이 싫다 해 이곳에 경교장(京橋莊)이라는 명칭을 새로 부여했다.
영국 왕립아시아협회가 소장하고 있는 1900년도 서울 지도에 따르면, 경교장 왼쪽에 남북으로 흐르는 하천이 있었고, 그 위에 경교라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이런 사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김구가 경교장에 마지막으로 거주한 날이었던 1949년 6월 26일 일요일이었다. 이날 오전 11시께 30대 초반의 장교가 경교장에 나타났다. 허리에 총을 찬 군인이었다. 그는 약 세 시간 뒤 김구를 암살하게 될 육군 소위 안두희였다. 이날 그는 허리에 찬 그 총을 사용하지 못했다(이 점은 뒤에서 설명한다).
그 시각, 김구는 현관문 앞을 기준으로 2층 왼쪽 창가에 있었다. 어쩌면 창문을 통해 안두희의 모습을 봤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종합신문인 <자유신문>의 1949년 6월 28일 자 보도를 근거로 이날 상황을 정리해보자.
안두희는 관리실에 들어가 당직자인 이풍식에게 면회를 신청했다. 안두희는 김구가 위원장으로 있는 한국독립당의 당원이었다. 그래서 김구와는 이미 안면이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 전에도 꽃병을 들고 김구를 면회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안두희의 방문 목적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풍식은 안두희에게 기다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안두희는 관리실에서 한참 기다렸다. 거물급 인사를 암살하러 온 사람치고 그는 너무 담담했다. 관리실에서 잡담까지 건넬 정도였다. 잡담의 주제는 주로 군사 문제였다.
첩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던 김구 암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