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군의 군복. 충남 부여군 규암면의 백제문화단지 안에 전시되어 있다.
김종성
백제의 절대적 우위는 백제 역사의 초·중기뿐만 아니라 말기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편에 따르면, 백제 최후의 왕인 의자왕은 집권 이듬해인 642년에 신라의 40여 성(城)을 불과 한 달 만에 점령했다. 멸망 5년 전인 655년에도 그는 고구려·말갈과 연합하여 고작 한 달 만에 신라의 성을 30여 개나 점령했다. 그가 19년간 빼앗은 신라의 성은 근 100개나 된다.
일반적으로 읍 단위에 세워지는 성 하나를 빼앗으면, 읍 주변의 지역들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주변의 면(面)들까지 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근 100개의 성을 빼앗았다는 것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근 100개의 읍에 더해 300~400개의 면까지 얻었다는 뜻이 된다. 이처럼 멸망 직전까지도 백제 군사력은 절대적 우위를 과시했다.
특이한 것은 이 시기에 신라 김유신 부대만큼은 승승장구했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백제가 우세를 유지하는 속에서도 유독 이 부대만큼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 본기'나 '김유신 열전'을 살펴보면, 김유신의 승리가 전투력이나 무기 체계의 승리라기보다는 심리전의 승리였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김유신은 부하들의 사기를 극대화시키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백제·고구려를 무서워하는 장병들의 용기를 북돋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죽기 살기로 싸웠고, 이것이 신라군의 승리를 이끈 핵심 요인이었다. 이런 예외를 제외하면, 신라군은 백제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백제 군사력이 우세했다는 점은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도 확인된다. 백제와 신라의 전투가 황산벌(충남 논산시 연산면)에서 벌어진 사실 자체가 이 점을 반영한다. 멸망 직전에 백제 조정의 야당인 성충파는 동부전선 최전방인 탄현(대전 동부 식장산 고개)에서 신라군을 방어하자고 제안했지만, 여당인 임자파는 신라군을 후방으로 끌어들여 한 번에 일망타진하자고 제안했다.
의자왕은 '최전방에서 방어하면 전쟁이 장기화될 위험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 임자파의 의견대로 신라군을 안쪽으로 끌어들여 전쟁을 조기에 끝내기로 결심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탄현보다 훨씬 더 후방인 황산벌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백제는 자기 집 담에서 신라군을 방어하지 않고 일부러 마당까지 신라군을 끌어들인 셈이다. 신라군을 마당에 가둬 놓고 한 번에 일망타진하려 했던 것이다. 이 점만 보더라도, 백제가 신라군을 얼마나 가벼이 생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황산벌 전투의 전개 양상에서도 이 점을 포착할 수 있다. 당시 백제군은 고작 5000명이고 신라군은 무려 5만 명이었다. 그런데도 백제군은 제1라운드에서 제4라운드까지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5000명이 5만 명을 상대로 4연승을 거둔 것은, 신라군 속에 비전투 병력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백제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신라가 역전승을 거둔 것은 군사력 때문이 아니었다. 소년 화랑인 반굴과 관창의 영웅적인 죽음을 목격한 김유신 부대가 죽기 살기로 달려든 것이 분위기 역전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런 돌발 변수가 없었다면, 제5라운드에서도 백제군이 승리하고 신라군은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서부전선의 당나라 군대 역시 고립무원의 상황에 빠졌을 것이다.
김춘추의 호언장담, 그야말로 대왕의 '꿈'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