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4호인 칠장사의 풍경. 안성시 죽산면 소재.
김종성
얼마 전, 경기도 안성시 일원의 역사 유적들을 답사하면서 조계종 사찰인 칠장사를 방문했다. 안성시 칠현산(중부고속도로 일죽 IC 부근)에 위치한 이 절은 신라 선덕여왕 때 세워진 사찰로서 근 1400년의 장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이 절의 건물 벽면에는 흥미로운 그림이 있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초상화가 바로 그것. 예전에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시청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준 적이 있는, 왼쪽 눈에 안대를 낀 궁예의 모습이 바로 거기에 있다. 물론 이 그림은 현대에 그려진 것이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에 따르면, 궁예는 본래 신라 왕족이었다. 그런데 '장차 나라를 해롭게 할 아이'라는 점괘가 나오자, 왕실에서는 갓 태어난 궁예를 죽여 없애려 했다. 왕의 측근이 건물 2층 누각에서 갓난아이를 내던지고, 아래에 있던 유모가 받아 가로채는 과정에서 아이의 한쪽 눈을 실명했다고 '궁예 열전'은 말한다.
그 후 궁예는 유모를 따라 각지의 사찰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곳 중 하나가 안성 칠장사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궁예가 칠장사에서 활쏘기를 하면서 어린 시절의 한때를 보냈다는 것이다.
서민경제 파탄, 궁예를 혁명의 길로 가게 했다칠장사와의 관계 때문인지, 궁예와 안성 지방의 인연은 그가 성장한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궁예가 혁명의 대열에 가담한 곳도 바로 안성이다. 궁예는 이곳에 있던 기훤이란 반군 지도자의 수하로 들어갔다.
훗날 궁예는 자신이 세상을 구원할 미륵부처라고 선전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궁예가 살았던 안성에는 미륵부처와 관련된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이와 관련된 불상도 많고 불탑도 많다. 이처럼 칠장사를 포함해서 안성시는 궁예와의 인연이 상당히 깊다.
궁예가 기훤의 수하가 돼 혁명가의 길을 걸은 것은 무엇보다도 당시의 경제 파탄 때문이었다. 궁예가 태어난 9세기 중후반은 신라 경제가 내리막길로 치닫던 시기였다. 쿠데타가 빈발하고, 가뭄과 흉작이 심했으며, 반정부 대자보가 여기저기 나붙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살림이 각박해지고 정부의 조세 수입도 감소했다. 이런 위기가 최고조에 도달한 시점이 진성여왕(재위 887~897년) 때였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서는 "(진성여왕) 3년, 국내의 여러 지방에서 세금을 바치지 않아 국고가 비고 재정 상태가 곤란해졌다"고 했다. 전국적으로 세금을 못 낼 정도로 서민 경제가 파탄됐던 것이다. 지금 말로 하면, 전국적으로 개인파산이 만연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궁예를 혁명의 길로 몰아넣었다.
상류층만 보고 '백성들이 잘 사는구나' 했던 헌강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