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승들 앞에서 무릎 꿇고 엎드린 나.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서영진 제공
한국이라면 쌀쌀함이 남아있을 2월 말과 3월 초순. 캄보디아의 한낮 기온은 섭씨 40도를 오르내린다.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숨이 턱턱 막히는 날씨.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가 많지 않은 나라지만, 흙길도 태양에 달궈져 후끈거리고 뜨겁다. 포장된 대낮의 아스팔트길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맨살이 닿는다면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
바로 그 길 위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맨발로 걷는 캄보디아의 어린 스님들. 소승불교 전통의 그 나라에는 시주를 청하러 다니는 수도승들이 많다. 인접국이며 비슷한 종교양식을 가진 라오스의 '새벽 탁발'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고, 외국인이 시주에 참여하기도 한다. 루앙프라방(라오스 서북부에 위치한 도시)의 탁발은 일종의 관광상품화 되기까지 했다.
2011년 2월과 3월. 두 차례에 걸쳐 1개월 정도 캄보디아에 머물렀다. 수도인 프놈펜과 앙코르와트가 위치한 씨엠립, 원시의 해변풍경이 펼쳐지는 시아누크빌 등. 아침부터 뜨겁게 이글대는 태양을 피해 카페나 식당 차광막 그늘에서 과일주스를 마시고 있노라면, 거리를 오가는 적지 않은 숫자의 동승들과 만날 수 있었다.
오렌지빛깔 선명한 캄보디아 승복을 입고,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총총히 길을 재촉하는 어린 스님들. 누군가가 자신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고 시주를 건네면 들릴 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축원의 말을 전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으면, 정확하게 표현하긴 힘들지만 발원지를 알 수 없는 경견함이 나에게까지 전해져왔다.
무릎 꿇는 걸 비굴한 행위라 생각해왔던 내가 그들 앞에 꿇어 앉아 머리를 숙인 게 언제가 처음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유는 단순했다. 많아야 열서너 살로 밖에 보이지 않는 동승들의 피곤한 발걸음을 잠시 쉬게 하고, 음료수나 과일 혹은, 빵을 그네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어린 스님을 내 앞에 멈추게 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 보였던 것이다.
맞다. 시작은 캄보디아 동승을 향한 연민이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무릎 꿇는 게 거듭될수록 기이한 마음상태에 이르게 됐다. 주스 병이나 바나나를 가방에 넣어주면, 어린 스님의 축원이 머리 숙인 내 앞에서 진행된다.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 주문 같은 웅얼거림에 마음이 한없이 편해졌다.
그 편안함을 얻으려고 어떤 날은 각기 다른 수도승 앞에서 10번 넘게 고개 숙여 무릎을 꺾었다. 축원의 주된 내용이 "신의 은혜가 당신에게 전해져 건강과 행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라는 건 한참이 지난 후 영어를 할 줄 아는 캄보디아인을 통해 들었다. 펄펄 끓는 아스팔트나 지저분한 흙길에 꿇어앉은 나는 목덜미로 굵은 땀을 흘리면서도 축원이 계속되길 마음속으로 빌었다.
왜 그랬을까? 지금 와서 짐작하건대 그 편안함의 이유는 아마도 불교에서 말하는 하심(下心)을 어렴풋이나마 체험한 때문이 아니었을까싶다. 스스로를 낮추고 상대를 떠받드는 행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 단순한 행동이 사람의 마음상태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날, 평화로웠던 내 마음의 상태는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