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에서 지척으로 보이는 북한 황해도 땅이 수평선 위에 떠 있다. 새 한 마리도 북한 땅을 바라보고 있다. 아득한 고려 시대에는 무심한 새는, 연평도와 예성강 사이의 서해 바다를 지나가는 당나라 상선 위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예성강> 노래의 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것이다.
정만진
당나라로 가는 배에 태워진 부인은 옷매무새를 단단히 여미고 중국 상인을 경계했다. 그렇게 노심초사한 끝에, 여러 차례 자신을 범하려 드는 하두강의 마수를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바다 복판에서 빙빙 돌기만 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죽고 사는 것을 언제든지 가늠할 수 없는 이들이 바로 뱃사람들이다. 사고는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미미한 경상은 애초부터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람과 파도, 안개 등의 방향과 정도에 극도로 예민하다. 그런 그들이, 망망대해 복판에서 배가 멈춰선 마당에 우왕좌왕하지 않을 리가 없다.
점을 쳤다. 당시 사람들에게 점은 곧 '과학'이었다. 절부(節婦)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배가 파선할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모두들 하두강에게 고려 부인을 예성강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요청했다. '과학의 힘'으로 부인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온 부인도 노래를 불렀다. <예성강> 속편. 물론 속편 또한 곡조도 가사도 전하지 않는다. 다만 짐작해보면 그녀는 노래를 통해 남편을 원망하여 이별을 통지했거나, 아니면 문제가 해소된 데 대한 안도와 기쁨을 읊조렸을 것이다.
어느 쪽일까. 전자일까, 후자일까. 나는 생각해본다. 부인에게는 본디 아무 잘못이 없었다. '예쁜 것이 죄'였을 뿐이다. 그리고 '여자로 태어난 것이 죄'였다.
그렇다고 서해 복판까지 끌려가는 고초를 겪어야 할 이유는 없다. 만약 그녀가 바다에서 노래를 불렀다면 전자였을 터이다. 하지만 노래는 예성강으로 돌아온 뒤에 불렀다. 이미 남편은, 노래까지 지어서 부른 것으로 볼 때, 진심으로 뉘우친 상태였다. 그러므로 <예성강> 속편은 아마도 후자의 내용이었으리라. 안도와 평화, 용서와 화해의 기운으로 가득찬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