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는 정몽주 초상. 1629년(인조 7) 김육이 비단 위에 그렸다. 보물 1110호로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김육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같이 누리리라
이방원의 노래는 '적당히 서로 도와가며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자'는 이야기다. 정몽주 역시 노래로 대답한다. 유명한 <단심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해 때를 노리고 있던 정몽주가 이방원의 회유에 그리 간단히 넘어갈 리는 없었다. 정몽주는 결코 이성계를 도울 수 없다는 뜻을 노래로 밝혔다.
'내가 죽고 또 죽어 백 번을 또 죽어서 흰 뼈가 흙이 되어 넋조차 없어질지언정 임금을 섬기는 마음이야 사라질 리가 있겠느냐.'마침내 정몽주는 이방원이 숨겨둔 자객의 공격을 받는다. 선지교(善地橋) 다리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영규 등이 휘두른 철퇴는 정몽주에게 처참한 죽음을 안겼다. 정몽주가 죽자 다리에는 갑자기 대나무가 솟아났다. 그 후 다리 이름이 선죽교(善竹橋)가 되었다.
선지교는 본래 고려 태조 왕건 때인 919년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화강암을 써서 만들어진 이 다리는 개성 남대문에서 1km쯤 동쪽의 자남산 남쪽 개울에 걸쳐져 있는데, 길이 8.35m, 너비 3.36m 정도의 전형적인 널다리라고 한다. 여기서 '라고 한다'고 표현한 것은 직접 눈에 담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