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후보가 지난 21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아 분향하고 있다.
남소연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파격 행보가 연일 정치권의 화제다.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은 민주통합당이다. 박 후보가 야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소에 참배하면서 허를 찔린 모습이다. '환영'과 '정치 쇼'라는 상반된 반응이 동시에 터져 나온 이유다.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 중 한 명인 안철수 서울대 교수도 지난 23일 시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봉하마을을 방문하고 이에 대해 문재인 의원이 바람직하고 긍정적이라고 평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것이 국민이 원하는 정치라고 생각했다"며 한 마디 거들었다.
박근혜 후보의 돌발 행보에 '멘붕(멘탈붕괴)'이 된 것은 야당뿐이 아니다. 21일 현충원 참배 후 봉하마을에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인사는 새누리당 내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박 후보의 일정을 챙겨야 할 실무자조차 당일 오전 언론을 통해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봉하마을 방문 준비에 나섰다. 박근혜 후보를 전담해서 취재하는 기자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봉하마을 간다'는 말에 '멘붕' 기자들 "아, 예"대선후보로 선출된 다음 날(21일) 오전 박 후보는 국립현충원으로 향했다. 대통령, 대통령 후보, 당 대표 등 주요 정치인들이 '거사'를 앞두거나 마친 후 검은 옷을 입고 비장한 표정으로 현충원을 참배하는 것은 관행처럼 되어 있다.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로 시작하는 판에 박힌 말이 예상되기 때문에 펜기자들에게 흥미로운 취재는 아니지만, 이른바 '그림이 된다'는 이유로 TV·사진 기자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취재다.
박 후보의 현충원 방문 때도 TV·사진 기자 수십 명이 대거 몰린 반면, 펜기자들은 3~4명에 불과했다. 검은색 플레어 스커트를 입은 박 후보는 굵은 빗줄기 속에 60여 명의 전·현직 의원들과 함께 현충원에 도착했다. 지난 15일 열린 육영수 여사 추도식에서도 입었던 옷이다.
박 후보는 담담한 표정으로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을 차례로 참배했다. 아버지인 박 전 대통령 묘역 앞에 선 박 후보는 간단한 묵념만 했을 뿐 다른 묘역에 비해 머문 시간도 길지 않았고, 별다른 표정 변화도 없었다. 특이 사항이라고 해봐야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 참배가 전부였기 때문에 현충원 방문 일정은 아무런 '사건'없이 마무리되는 듯 했다.
참배를 모두 마친 박 후보가 현충원을 나설 즈음 몇 안 되는 기자들이 따라 붙었다. 그러나 특별히 물어볼 질문이 없었던 한 기자가 가볍게 던진 질문이 '화근'이 됐다. 이 기자는 "오늘 오후에 뭐 하세요"라고 물었고, 박 후보의 입에서는 "봉하마을에 가요"라는 답변이 나온 것. 순간 기자들의 표정이 굳었다. 너무 당황한 기자들은 왜 봉하마을에 가는지, 봉하마을에 가면 고 노무현 대통령의 부인인 권양숙씨를 만날 것인지, 봉하마을에 가는 의미가 뭔지 등 후속질문조차 하지 못한 채 "아, 예"라며 입을 닫았다.
'집권여당 대선후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에 참배하기 위해 봉하마을에 간다'는 대형 뉴스를 접한 순간이었지만, 너무나 예상 밖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자들도 '멘붕'에 빠진 것이다.
봉하마을 방문에 대해 박 후보의 선거캠프 내에서는 '오래 전부터 기획됐다'고 해명했지만, 정작 방문 일정을 알고 있던 인사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특히 새누리당은 박 후보의 입에서 나온 갑작스런 오후 일정을 뉴스로 접했고, 그제야 허겁지겁 봉하마을에 연락을 취하는 등 준비에 나섰다. 이 때문에 민주통합당으로부터 "사전에 통보도 하지 않은 예의 없는 방문"이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사전에 준비된 일정이 아니었다는 정황은 곳곳에서 발견됐다. 이원기 당 행정실장이 의전, 경호, 행정 등 1인 3역을 소화할 정도로 급박하게 일이 진행됐다. 특히 당과 박 후보의 비서진 사이에 제대로 의사소통이 안 되다 보니 헌화 문제 등 현장에서의 준비 과정에도 문제가 생겼다. 박 후보의 봉하마을 방문에 대한 대변인 브리핑도 당 명의로 나갈 것인지, 후보 캠프 명의로 나갈 것인지가 사전 조율이 안 돼 혼선을 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