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에 전시된 이하응의 밀랍인형. 서울 종로구 운니동 소재.
김종성
이하응이 아들을 왕으로 만든 것은, 아니 아들을 왕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왕위계승순위에서 아들에게 밀렸기 때문이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그는 자신이 직접 왕이 되려 했을 것이다.
아들을 두지 못한 철종이 사망했을 당시, 철종에게는 7촌 조카들이 있었다. 흥선군의 아들과 조카들이 이에 해당했다. 흥선군은 철종의 6촌 형제였기 때문에, 철종의 7촌 조카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선왕의 후계자는 선왕보다 아래 항렬에서 뽑는 게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흥선군이 아들을 왕으로 민 것은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하응은 섭정 자격으로 통치권을 행사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섭정 자격을 잃은 뒤에도 그의 권력이 계속될 수도 있었다. 섭정을 하는 동안에 권력 기반을 좀더 공고히 했다면, 아들이 친정을 선포한 뒤에도 그는 막후 실력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하응이 철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됐거나 혹은 계속해서 막후 실력자로 남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 경우에는 조선이 적어도 12년의 시간을 벌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12년의 시간을 번 결과로 조선의 멸망을 막을 수 있었을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정도의 시간을 벌었을 것이라는 점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조선이 결정적으로 약해진 시기는 1882~1894년이다. 이 12년간 조선은 청나라의 극심한 내정간섭을 받았다. 학계에서는 이 내정간섭을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공전(空前)의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청나라 외교관인 원세개(위안스카이)가 주도한 내정간섭으로 인해 조선의 국력이 급속도로 약해졌기 때문이다.
이 12년간, 조선의 왕은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일개 외교관에 불과한 원세개가 조선의 정치·외교·군사를 좌지우지했을 정도다. 경제도 마찬가지였다. 1882년 이후 영국제 면직물의 시장점유율이 높아지면서 조선의 산업기반은 크게 약해졌다. 그것이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였다.
또 그 12년간, 일본 해군력이 조선은 물론 청나라까지 추월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18세기 후반부터 일본이 조선을 경제적으로 추월한 것은 사실이지만, 18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의 국력은 그리 막강한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1886년부터 해군력을 집중 증강한 탓에,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때 청나라 해군을 격파하고 아시아 최강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일본이 해군력 증강을 추진하는 동안에 조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일본의 성장을 그냥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청나라의 내정간섭으로 인해 조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12년간 조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외국 기업이나 상인들이 조선에서 좀더 쉽게 돈을 벌 수 있도록 이것저것 개방하는 것뿐이었다. 그 12년간 일본은 청나라를 능가하고 그런 여세를 몰아 조선까지 삼켜버렸으니, 그 12년을 잘 활용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의 쇠약, 강화도 조약 때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