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모습어르신들이 남양보건지소에서 한방치료를 받고 있다.
최성규
맥을 짚다가도 당혹스런 적이 있다. 처음 방문하신 조 할아버지를 꼼꼼히 진찰했다. 맥을 짚어 볼 차례. 손목 부근에서 요골동맥이 지나가는 부분에 손가락을 살짝 올려놓았다. 기운이 아무리 약하다 한들 박동조차 없을 순 없다. 아주 가끔 요골동맥이 손등쪽으로 주행하는 사람도 있어서 짚는 위치를 바꿔보았다. 마찬가지다. 절맥(切脈 ; 맥이 끊어짐)이 아닌 이상 이럴 순 없는데. 같이 내외하시는 설 할머니가 그제야 눈치를 채셨다.
"그건 동맥 수술을 했다요." 아저씨는 건설현장 노동자였다. 한창이던 50대. 벌교 근처에서 일을 얻었다. 철근을 절단하고 봉합하는 게 주된 업무. 한창 몰두하던 중 철근이 떨어지면서 왼쪽 손목을 크게 베어 버렸다. 요골 동맥이 잘린 자리에서 피는 분수처럼 솟구쳤다. 부랴부랴 병원을 찾았지만 시골 근처 병원들은 손사래를 쳤다. 이 병원 저 병원 옮겨다니다 시간이 촉박하여 동맥을 잇는 대신 그냥 봉합해 버렸다. 그 말을 들으니 이제야 봉합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고되고 힘들었던 삶의 흔적이 더 이상 뛰지 않는 맥박을 통해 전해져 왔다.
때로는 동물에게 혼쭐이 날 때도 있다. 류옥근 아저씨가 무릎이 아프다길래 양말을 벗으라 했다. 발 등에 있는 태충(太衝)혈에 침을 놓기 위해서였다. 타박상을 입었는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소를 키우는 아저씨는 닷새 전 축사에서 작업을 했다.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소가 제 고집대로 앞으로 나가려고만 했다. 여기로 오라며 고삐를 뒤로 살짝 젖혔다. 소님께서 그날따라 비뚤어진 탓인지 확 달려들면서 뒷발로 주인을 밟은 것이다. 어떤 소는 뒷걸음치다 쥐도 잡는다는데. 짐승 탓을 하지 않는 걸 보니 소는 무사히 체벌을 넘긴 것인가?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라 하는 시골에서는 무엇보다도 고된 농사일이 사람을 잡을 때가 많다. 박 아주머니는 오른쪽 4번째 손가락이 둘째 마디까지 없다. 피가 나면 그치고 상처가 나면 아물고 멍이 들면 나을 것이다. 허나 없어진 건 어떻게 할 것인가? 오래 전 일이라 그녀는 기탄없이 말해주었다. 13년 전 가을의 일이었다.
함수율이 24%까지 익은 벼를 베려고 콤바인을 가지고 출동했다. 콤바인은 농작물을 베는 일과 탈곡하는 일을 동시에 하는 기게인데, 예취작업과 탈곡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점에서 '결합'의 의미로 명칭이 붙은 것이다. 콤바인이 짚더미를 한껏 머금어 탈탈탈탈 턴다. 갑자기 기계가 끽 멈추었다. 양껏 먹다보니 짚더미에 체한 것이다. 목구멍에 걸린 볏가리를 빼주려다 날에 손이 상해버렸다. 가로로 손가락 마디가 잘렸으면 봉합이 가능한데, 세로로 길게 베인 것은 수술이 불가능했다.
오히려 그때 상황이 감사한 모양이다.
"어떤 사람은 손목까지 잘린다네. 옷을 어떻게 입는냐에 따라 다른디. 손꾸락 하나면 천만다행이지. 하나만 날에 닿았응께." "그나마 많이 쓰는 손가락이 아니네요. 뭐 불편한 거 없으세요?""아침에 세수할 때 말이지. 급하게 하다 보면 콧구녕을 쭈셔요." 말해놓고 자기도 웃긴지 한 말을 되풀이한다. 덩달아 옆에 친구분도 웃었다.
"어, 또 있제. 겨울에 고무장갑 낄 때 부대끼지." 하나씩 읊는 아주머니에서 눈동자를 골똘히 굴리며 외운 걸 발표하는 학생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아픈 기억은 더 없이 희미해지고 평범한 일상에 녹아들었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했다. 나는 이들을 한국의 찰리 채플린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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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뛰지 않는 맥박, 그의 삶이 어땠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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