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차원의 가족 재구성을 보여준 영화 <가족의 탄생>
롯데엔터테인먼트
빨간 구두를 신을까, 아님 까만 부츠를 신을까. 신발장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대학 친구다. 오늘 만나기로 한 약속을 취소하자고 한다. "에이, 나 벌써 다 준비했는데." 투덜대며 그 이유를 물었다. 엄마네 '아주머니'가 갑자기 열이 나고 아파서 모시고 병원에 가야 된단다. 얌전하고 조신하게 보였던 그 아줌마. 지금부터 38년 전. 대학 1학년 때 친구들이 모두 모여 그 친구 집에 갔었다. 30대 중반쯤 됐었을까. 짤막한 키와 다소 통통한 몸매의 그 아줌마는 친구 집의 가정부였다.
결혼하자마자 아들 하나만 달랑 남겨놓고선 세상을 떠난 남편. 아줌마는 친정엄마에게 아들을 맡기고 낮에는 내 친구 집에서 파출부 일을 해가며 아들을 혼자 힘으로 대학 보내고 장가까지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네 집에서 며느리와 함께 산 지 1년을 못 넘기고서 집을 나오더니 그 후로는 아예 내 친구 집에서 입주 가정부 노릇을 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서, 그 아줌마 나이도 혼자서 살기 만만치 않은 70대 나이가 되었을 터인데 아직까지도 그 집에서 입주 가정부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영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자 친구는 지금은 입주 가정부가 아니라 같이 사는 피붙이 가족 같은 관계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진짜(?) 파출부가 집에 와서 청소며 빨래를 해주고 가고, 정작 이 아줌마는 친구 엄마 입에 맞는 반찬이나 가끔씩 해주며 얘기나 같이 나누는, 지금은 '입주 동무' 노릇을 착실히 하시며 사시는 모양이다.
'70대 입주 가정부'와 가족 꾸리며 사는 친구네 엄마'나만 놔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 남편이 야속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지만, 다 짝 지어주고 결혼까지 시킨 자식들과 같이 살기엔 부담이 되고 또 자식들에게도 부담을 주기 싫고. 다행스럽게도 남겨진 재산이 넉넉하게 있으니 그 돈으로 둘이 오순도순 자매같이 남은 생을 살겠다'고 주장을 하시며 고집을 부리시는 엄마를 영 이해할 수 없다며 친구가 한바탕 푸념을 늘어놓는다. 시시때때로 불러내며 "우리 둘 제주도 데려가라, 꽃구경도 시켜 달라. 아줌마가 아프니 병원 모시고 가라"는 둥. 아줌마 병원 치다꺼리까지도 자식들에게 다 시키는 엄마가 야속할 때도 참 많단다.
하지만 늦은 나이에 서로 의지하시고 외롭지 않게 사시는 두 분이 좋아 보여서 딸 입장에서 볼 때는, 엄마가 자식들과 함께 사는 것보다 두 분이 같이 사시는 것이 엄마에게 더 행복을 줄 것 같아 오히려 짐을 던 것 같이 홀가분하단다. 미안하지만 우리 둘의 약속은 다음으로 미루자고 하고는 친구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아줌마는, 오랫동안 그 집에서 부엌일을 도맡아 했으니 좋아하는 반찬이나 슬슬 만들어 주면서 자식에게 서운했거나 속상했던 얘기나 같이 하고 서로 들어주며 살고. 친구 엄마는, 자식과 함께 살면 자기 돈은 돈대로 쓰면서도 자식에게 골치 아픈 부담 덩어리가 될 터인데 그건 죽어도 싫고, 다행히 가진 돈은 좀 있으니 그 돈으로 의료비며 식비며 둘의 노후를 위해 쓰면서 둘이서 친구같이, 동생같이 외롭지 않게 살아가면 되고. 누가 주인이며 누가 고용인이라 할 것도 없다.
한 명이 아프면 서로 죽 끓여 대령시키고, 봄에 꽃구경이며 가을에 단풍놀이까지 둘이 모두 같이 하며 함께 예쁘게 나이 들어가시는 두 분. 서로 손 잡아주고 이끌어주며 자매로 살아가시는 두 분을 볼 때면 '가족의 탄생'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돌싱'과 독신 후배의 결합... '미래의 가족'은 이런 모습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