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전쟁 당시 사진 자료(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
이윤기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에 의해 식량이나 물을 강탈당해 굶어 죽거나, 일본군의 위협 때문에 전장으로 탄약과 식량, 물 등을 나르다가 포탄에 맞아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또 일본군은 주민들이 피난 장소로 사용하던 '가마(자연동굴의 일종)'나 묘에서 주민들을 내쫓아 전장에 방치하거나, 오키나와 방언을 사용하는 주민들을 스파이로 몰아 처형하기도 했다. 일본군 상부는 "오키나와어로 이야기하는 자는 간첩으로 보아 처분하라"는 명령을 직접 하달한 상태였다.
그 이외에도 미군이 뿌린 항복권유 삐라를 주워서 보거나, 다른 주민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던 사람들이 살해당했다는 사례도 있다. 또한 주민들의 피난장소로 들어온 일본군들은 위치를 발각당하지 않기 위해 유아나 어린이들을 내쫓거나 죽였다. 군 비행장이나 진지 구축에 동원됐던 주민들이 군사기밀을 유출할 것을 두려워해 미군에 투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군관민 공생공사'라는 지도방침을 내려보내 많은 곳에서 부모, 형제, 자식, 친척, 지인들이 서로 죽이도록 명령하거나 이를 강요했다.
소위 '집단자결'이란 이러한 강압적인 상황 하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오키나와 전역에서 벌어졌고, 특히 일본군이 전략지구전을 펼쳤던 오키나와지마 중·남부에서 많은 사례가 발견된다.
오키나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서 거의 유일하게 수십만 민중의 일상생활 터전에서 대규모의 지상전이 벌어진 지역이다. 밀고 들어온 미군은 지상전투부대만 18만여 명이었고 후방 지원부대까지 합치면 54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일본군은 10만 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중의 약 3분의 1은 오키나와 현지에서 징집한 보조병력이었다.
1945년 4월 1일에 오키나와 섬의 서해안에 상륙한 미군은 82일간 일본군과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전쟁이 끝난 뒤 마부니 언덕에 건립된 '평화의 초석'에는 다음과 같이 희생자의 수가 적혀 있다.
오키나와 주민 14만9000명일본군 7만5000명미군 1만4000명영국 82명대만 8명북한 82명한국 263명(2002년 6월 현재)총 24만 명 이상의 인원이 사망할 정도로 치열한 전장이 된 오키나와는 사실상 일본 본토를 위한 총알받이였다. 역사적으로 류큐 왕국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갖고 있었던 오키나와는 1609년 일본에 점령당했다. 이후 일본 속국이면서도 자치를 유지했던 오키나와는 1879년 일본의 하나의 현으로 강제 병합되었다. 이런 역사 속에서 오키나와는 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철저하게 본토를 위해 '버린 돌'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오키나와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최대한 지구전을 벌인다는 계획이었고 일본 수뇌부는 "오키나와는 100% 희생해도 괜찮다"는 전략이 짜여 있었다. 이를 통해 일본 본토, 나아가 천황제를 지킨다는 이른바 '고쿠타이고지(國體護持:こくたいごじ)'의 철저한 도구가 된 것이다.
일본과 미국의 '이중식민지', 오키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