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구속 수감 당시 '고문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의 모습
연합뉴스
"남영동에서 20여 일간 고문을 당하는 동안 '그'는 항상 핏발 선 눈빛이었고, 90kg이 넘어 보이는 거구로 칠성판 위에 묶고는 깔고 앉아 목을 조르고 물고문, 전기고문, 발바닥 구타 등을 쉼 없이 했다." - 전노련 사건 고문피해자 박문식씨 증언(<한겨레> 1988. 12. 21.)
"시멘트 바닥에 3시간 가량 무릎을 꿇려 놓았다가 자신의 무릎으로 허벅지를 찍어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은 일도 있었다. '그'는 항상 눈에 핏발이 서 있었으며, 칠성판을 자신이 발명했다고 자랑하기도 했었다." - 김태홍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증언(<동아일보> 1988. 12. 22.)'그'로부터 고문을 당한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그'의 눈엔 핏발이 서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90kg이 넘는 거구에 칠성판을 발명한 고문의 대가 '그'. '그'는 이 별명 외에도 '성명불상자', '반달곰', '고문기술자' 등으로도 불렸는데 그가 바로 5공 시절 고문왕 이근안 전 경감입니다.
이근안은 치안본부(경찰청 전신) 남영동 대공분실에 근무하면서 각종 시국사범들의 고문수사를 지휘해온 장본인입니다. 이근안은 "민주화가 되면 너희들이 나를 고문해라"고 말했을 정도로 파렴치할 뿐더러 목사가 된 지금 다시 '공안목사'라는 딱지를 달고 있습니다. 고문경찰관의 대명사로 불리는 그의 인생역정을 한번 더듬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근안은 공군 헌병 출신으로 1970년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했습니다. 1972년부터 대공(對共) 분야에 근무하게 된 그는 매번 특진으로 승진을 거듭해 1984년 경감에 올랐습니다. 고문혐의를 받고 잠적할 때까지 그는 근무기간 대부분을 대공분야에 몸담은 이른바 '공안통'이었는데, 재직기간 중 모두 16차례의 표창을 받은 바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간첩검거 유공이 4회, 1979년 청룡봉사상(조선일보사 시상), 1981년 내무부장관 표창, 1982년 '국가안보 기여'로 9사단장 표창, 1986년엔 대통령으로부터 옥조근정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가 받은 표창의 이면에는 무수한 고문 피해자들의 피울음과 절규가 서려 있는 셈이라고 하겠습니다.
한동안 '얼굴 없는 고문기술자'로 불리던 이근안은 그가 고문했던 고 김근태 전 의원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1988년 6월 30일 특별가석방으로 풀려난 김 전 의원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6차례에 걸쳐 자신을 고문한 '이름 모를 전기고문 기술자'가 이근안임을 밝혀냈습니다. 김 전 의원은 이재오(서울민중연합의장, 현 한나라당 의원), 이선근(전노련 사건 관련자), 박문식씨 등 3인을 통해 사진 속의 인물이 자신들을 고문한 이근안임을 확인한 것입니다.
김 전 의원의 제보를 받은 문학진 <한겨레> 기자(현 민주당 의원)의 끈질긴 추적 끝에 <한겨레>의 특종보도(1988. 12. 21.)를 통해 비로소 이근안의 얼굴이 세상에 공개됐습니다. 그의 신상이 확인되자 고문피해자들은 그를 불법체포 및 고문 혐의로 정식 고발하였고 그는 마침내 수배되었습니다.
세상에 얼굴이 알려지자 이근안은 곧바로 잠적하였습니다. 그러나 검경은 그를 체포하는 데 미온적이었습니다. 경찰은 검거 노력은커녕 오히려 그가 은신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당시 치안본부 5차장이던 박처원 치안감과 동료 경찰관들은 조직적으로 그를 비호하였습니다. 특히 박처원은 도피 중인 이근안에게 1500만 원을 생활비 조로 지급하였으며, 수배 중인 그가 퇴직금까지 받아가도록 도와주었습니다.
1992년 가을 당시 김수현 전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반장은 이근안의 집으로 찾아가 숨어 있던 그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집 벽장에서 숨어 지내던 이근안은 1999년 10월 28일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자수하였고, 1999년 11월에 구속 기소되었습니다. 2000년 9월 대법원에서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이 확정되었는데, 그가 저지른 악행에 비하면 비교적 가벼운 것이랄 수 있습니다.
2006년 징역 7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그는 돌연 성직자로 변신하였습니다. 도피 시절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그는 옥중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측 총회신학교 통신신학부 4년 과정을 이수한 후 2008년 10월 30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다음 '아고라'에서 그의 목사 안수 취소 움직임이 이는 등 반발도 적지 않았습니다.
김근태 전 의원 타계를 계기로 그의 근황을 전하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는데, 작년 12월 31일자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그는 2010년부터 각종 언론 인터뷰에 응해 과거 자신의 행적을 정당화하는가 하면, 목사라는 신분을 이용해 대외활동에 나서 안보태세를 강조하는 등 과거 공안수사관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공안수사관'서 '공안목사'로 변신한 셈입니다.
[정형근] 고문 혐의 피소만 10건... 3선 국회의원 출신으로 '떵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