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신세경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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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법전들, 이를테면 <수교집록><속대전><대전회통> 등에서는 "궁녀가 바깥사람과 간통하면 남녀 모두 즉각적으로 참형을 가한다"고 규정했다. '바깥사람'이란 임금 이외의 남자를 가리킨다. 궁녀가 임금 이외의 남자와 성관계를 가지면 참형(참수형)을 받아야 했다.
이런 실상을 반영하는 대표적 사례가 현종(숙종의 아버지) 때 발생한 '귀열이 사건'이다. 현종 8년 5월 20일자(1667년 7월 10일) <현종실록>에 따르면, 귀열이란 궁녀가 서리(하급 관료)인 이흥윤과 성관계를 가져 아이까지 임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흥윤은 귀열이의 형부였다.
궁녀의 배가 볼록해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에 충격을 받은 조정에서는 논의가 분분했다. 형조(법무부)와 승정원(대통령비서실)에서는 교수형 정도로 처리하자고 건의했고, 현종은 자기 혼자 끝끝내 참형을 주장했다. 결국 현종의 주장이 관철됐다.
한번 궁녀는 영원한 궁녀였다. 궁에서 퇴직한 뒤에도, 성관계 금지의무는 평생을 두고 집요하게 궁녀를 쫓아다녔다. 그래서 전직 궁녀와 살림을 차리는 것 역시 법으로 엄금되었다. 이와 관련된 사례가 세종 21년 5월 15일자(1439년 6월 26일) <세종실록>에 기록된 '이영림 사건'이다. 장교 이영림이 전직 궁녀와 간통한 사건이었다.
사헌부(검찰청)에서는 이들에 대해 참형을 주장했다. <세종실록>에서는 이영림이 참형보다 2단계 낮은 형벌을 받았다고 했다. 목을 베는 대신 사약을 내린 듯하다. 한편, 전직 궁녀가 감형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 궁녀에게는 참형이 그대로 적용된 듯하다.
또 법전인 <경국대전>에서는 전직 궁녀를 처나 첩으로 맞이하면 곤장 100대를 때리겠다고 규정했다. 전직 궁녀와 한번만이라도 성관계를 가지면 참형을 가하면서도, 전직 궁녀와 결혼하면 사형 대신 곤장을 친 것은 고위층이나 왕족들의 위신을 고려한 것이었다.
전직 궁녀를 처나 첩으로 맞아들이는 남자들은 주로 고위층이나 왕족들이었기에, 그들에게 참형을 집행하기 어려워서 그렇게 규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곤장 100대를 맞고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 이 경우도 사실상 사형을 규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현직이든지 전직이든지 간에 궁녀를 가까이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외간남자와 궁녀의 사랑에 관용을 베푼 왕이런 현실에 분노를 느낀 용감한 선비가 있었다. 현종 때의 승지(대통령비서관)인 김시진이 그 주인공이다. 현종 3년 4월 2일자(1662년 5월 19일) <현종실록>에 따르면, 그는 전직 궁녀에게도 결혼을 허용하자는 파격적인 건의를 올렸다. 그러나 이 건의는 묵살되었다. 귀열이 사건에서 나타난 것처럼, 현종은 그런 관용을 베풀 남자가 아니었다.
이렇듯, 궁녀와 더불어 살림을 차린다는 것은 실정법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드라마 속 채윤은 좋은 임금을 만났으니 '나쁜 소원'을 품을 수 있지만, 그런 소원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조선시대 남자들에게, 궁녀와의 사랑은 원칙상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