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화백. 고향을 떠난지 15년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고향에 돌아와 다시 붓을 들 수 있었던 것은 고향에 있던 친구, 동료들 덕분이었다.
안소민
"제가 민미협활동을 하던 20~30대에는 단체전을 많이 했어요. 그 당시에는 그림을 통해 이념과 사상을 표현했기 때문에 오히려 단체전이 더 호소력 있었죠. 단체전이니, 개인전이니 그것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니까요."첫 개인전에 대한 이 화백의 감회는 특별하진 않다. 그냥 무덤덤하다고 했다. 원래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온 것 뿐이다. 허나, 어찌 무덤덤하기만 할까.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는 안온함과, 화가 본연의 길로 들어섰다는 기쁨은 손뼉치고 어린아이처럼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할 기쁨은 아니다. 오히려 고요한 환희다. 마치 ,흰 눈이 쌓인 조용한 시골길을 걸을 때 느끼는 충만한 기쁨. 그것은 첫 눈이 올 때 느끼는 설렘과는 분명 또 다른 느낌일 것이다.
15년이 지난 후, 그의 미술세계도 변했다. 주먹과 투쟁, 총, 칼을 버리고 그가 택한 소재는 우리 농촌의 모습이었다. 실제 전주 교외에 사는 이기홍 화백은 농촌의 풍경에서 자신의 소재들을 찾는다. 하늘, 땅, 산, 논, 안개, 비, 구름,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의 그림속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는 왜 홀연 고향을 떠났던 것일까. 그는 대답대신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냥 어느날 문득, 떠나고싶었어요. 이렇다 할 특별한 이유는 없었죠. 결혼할 때도 어느 순간, 눈에 뭐가 씌어서 결혼하잖아요. 아마 저도 그랬나봐요."
우리도 살다보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젊은 시절, 이화백의 서울행도 아마 그런 것일지 모른다. 주변 친구들과 동료들이 그렇게 만류했지만 그는 서울을 택했다. 그곳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했다. 미술계를 아주 떠나지는 않았지만,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그림은 그리지 못했다. 그림에 늘 목이 말랐다. 그러나 그가 더욱 힘들었던 건, 어려운 경제형편이었다. 그림은 그 다음이었다. 예술도 창작도, 모두 경제적 안정이 뒷받침된 후에야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방랑은 15년이면 족했다. 귀향을 결심하고, 그는 다시 붓을 쥐었다.
'...(전략)오후에는/ 그림 그리는 기홍이 낙향/ 집들이 갔다/ 전주 변두리 시골이다. 낡은 집, 가난이 환하다. 가슴이 막막하다. 눈물이 솟아난다. 참았다. 80연대, 옛 친구들이 흘러간 노래를 부르며 오래된 흙 마당에 서성인다. 흩어져있는 허름한 세간들, 속살이 허연 김치, 식은 삼겹살, 풋고추, 흰마늘/ 철없는 어린 딸이 뛰어다닌다... (후략)' -김용택 시인이 이기홍 화백이 귀향한 날 쓴 시 <섬진강 40> 일부- 겨우, 한 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그의 삶 전체를 엿본다는 것은 무리다. 그의 그림에 어떤 깊은 철학과 사상이 담겨있는지 알 수 없다. 아는 척하는 것도 교만이다. 그냥 평범한 한 관객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감상을 말해본다면, 이번 전시회에서 만난 이화백의 그림은 평온함과 고요를 안겨준다. 그림은 보는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겠지만, 초겨울 문턱에서 그의 그림을 본 순간, 나는 '생명'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