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거두 이범익의 공적비 앞면
강기희
비문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이 비석이 세워진 그해(1932년)에 이범익이 정선에 다녀간 것으로 보입니다. 정선지역 향토사 자료에 따르면, 정선의 동쪽, 즉 지금의 화암면인 '동면' 지역은 일제 당시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금광이 있던 곳입니다. 현재 화암동굴로 관광명소가 된 이곳에는 '천포광산'이 있었는데, 이 금광은 당시 조선에서 5대 금광 중 하나로 불렸습니다.
광산이 있던 이곳은 정선에서 전기가 가장 먼저 들어왔는데 이는 금광 때문이었습니다. 추정컨대 이범익은 강원도지사 재직 시절(1929~1935) 일본인들의 채금작업을 지원하기 위해 금광 인근까지 신작로를 개설하거나 또 기타 부대시설을 지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때 든 비용이 '십만 원'이었고, 이를 고맙게 여긴 당시 정선군수 김택림이 문제의 공적비를 세운 셈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문제의 비석과 관련된 정선군수 김택림과 강원도지사 이범익의 일제하 친일행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평남 평양 출신의 김택림은 16세 되던 해인 1904년 평남 중화군 사립 일어학교 특별과를 졸업한 후 평양감리서 통역을 거쳐 관리로 진출했습니다. 평남, 강원도 일대 군청 서기 등을 지낸 그는 1930년 5월 군수로 승진해 강원도 정선군수에 임명돼 1933년 5월까지 만 3년간 재직했습니다.
군수 재직 중 그는 '훈6등 서보장'을 받았으며, 퇴임 후에는 김화상사(金化商事) 감사역, 김화군소작위원회 예비위원, 김화수리조합 간부 등을 지냈습니다. 군수 출신임에도 이례적으로 그는 1936년 강원도 통천군 순령면장에 임명되었는데, 이듬해 중일전쟁이 터지자 군수품 공출, 군사원호, 국방헌금품 모집 등 전쟁지원 업무를 적극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또 태평양전쟁 발발 후인 1943년 3월 강원도 통천군민들이 모금하여 구입한 애국기 '통천호' 헌납식 때 통천군수와 함께 헌납대표로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군수 출신 가운데는 친일행위가 구체적이며, 적극적인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음은 이범익. 이범익은 수많은 친일파 가운데 1등급에 드는 거물입니다. 그가 일제(만주국 포함) 때 역임한 대표적 직함 몇을 소개하면, 중추원 참의·도지사·만주국 참의부 참의·간도성 성장(省長) 등으로 이는 엔간한 친일파라도 하나 맡기도 어려운 고위직이랄 수 있습니다.
중추원 참의 하나 빼고는 모두 막강한 권한을 가진 자리였으며, 특히 그는 국내와 만주에서도 요직을 맡았던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기소유예'로 풀려났습니다.
이범익은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한 지 두 달만인 1949년 3월 반민특위 경기도조사부에 의해 체포돼 조사를 받았으나 반민특위가 문을 닫기 직전인 8월에 기소유예로 풀려나 면죄부를 받은 셈입니다. 그의 생몰연대에서 사망연도가 없는 것은 그가 한국전쟁 때 납북됐기 때문입니다. 오욕으로 얼룩진 그의 삶을 추적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