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제도가 도입된 초창기 일일이 집을 돌아다니면서 우편을 전달한다는 건 보통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문패조차 없는 집이 많았고, 편지봉투에 주소를 제대로 못쓰는 이도 많았다. 그 시절 자전거는 우편업무의 효율성을 꽤 높여줬다. 사진은 1900년 무렵 우편배달부.
한국콘텐츠진흥원&한국문화정책연구소&나우아이
1922년에 이르면 경성국 우편배달자전거는 19대로 늘어난다. 일부에서는 자전거를 대신하는 시도들이 이뤄졌다. 전화는 우편업무를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는 수단이었다. 1920년 4월 경성우편국은 일어가 능숙한 조선 여성을 처음으로 전화교환수로 뽑았다. 자격은 보통학교 졸업, 나이는 15~16세부터 23~24세까지였다.
걸림돌은 여성의 사회활동에 부정적인 사회인식이었다. 무엇보다 전화교환수는 종종 야근을 해야 했다. 해가 진 뒤 젊은 여성이 거리를 다니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분위기에서 우편국 측은 전전긍긍했다. 경성우편국은 야근하는 여성 교환수의 경우 우편국에서 퇴근하는 시간과 집에 도착하는 시간을 매일 기록하고 시간에 조금만 차이가 나도 조사하겠다고 부모를 안심시켰다. 즉, 퇴근 뒤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샐 가능성을 없애는 조치였다.
1923년 7월경 인천우편국과 취인소(오늘날 증권거래소)를 오가는 업무를 자전거 대신 전화로 바꿨다. 1934년 1월 1일엔 전보배달 스피드서비스가 실시된다. 수신인이 전화가입을 한 경우 발신인이 발신할 때 전화송달을 지정하면 착신국소에서 전화로 수신인을 호출해 전문을 읽어서 보냈다. 자전거나 도보로 배달할 때보다 훨씬 빨라졌다. 대량우편물일 경우엔 자동차로 운반했다.
물론 특수한 경우였다. 자전거는 당시 가장 널리 쓰이는 교통수단이었다. 1922년 4월 당시 경성 시내 자동차는 136대. 그에 비해 자전거는 5600대가 넘었다. 인력거나 짐수레 등 다른 교통수단도 자전거에 비해선 그 숫자가 적었다. 자전거는 차체 무게에 비해 짐을 많이 실을 수 있고 어떤 길이라도 달릴 수 있어 효율성 좋은 교통수단이었다. 자전거 우편배달은 점차 증가했다. 문제는 도로 사정이었다.
경성 시내의 도로는 일간 이상의 도로가 이십만칠천구백사십팔 간으로 면적은 칠십오만사천 평인데 전 경성 면적 일천육십여만 평에 비례하면 겨우 칠'퍼센트'에 해당하여 현대 선진도시에서 도시 전 면적의 이 할 오 분 내지 삼 할을 이상으로 삼고 계획하는데 비교하여 보면 경성은 인구로 보나 면적으로 보나 외국 도시의 도로 삼분의 일에도 못 되는 현상으로 가위 무도로상태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 하며…. - <동아일보>(1928년 10월 2일)1920년 우편업무에 처음 자전거가 쓰였지만 여전히 자전거는 경성과 대도시 우편업무 위주였다. 지방 우편배달부들은 우편물을 등에 짊어지고 힘들게 걸어 다녔다. 해방 직후인 1946년 1월 군정청 체신국은 지방우편국에 배달용 자전거가 없어 대책을 찾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때쯤 우편배달업무는 꽤 자리를 잡았던 모양이다. 1948년 12월 공보처가 시청 직원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우편배달은 신속합니까"란 질문에 "네"라고 응답한 답변은 80%에 이르렀다.
자전거 우편배달부,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