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에서 건설진흥회 주최로 열린 건설부 장,차관 환영, 환송 간담회에서 역대 건설부 장관들이 환담하고 있다. 오른 쪽 두번 째 이한림 전 장관. 이한림 전 장관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건설부 장관을 지낸 바 있다.(1986.1.28)
연합뉴스
여러 곡절을 거쳐 미국으로 쫓아 낸 장본인이지만 이한림은 그래도 박정희를 옛 친구로 대했다. 이한림은 박정희에게 다시 사담을 건넸다.
"그런데 자네 왜 그렇게 검은 안경을 끼고 다니냐?" "너무 고단하게 뛰어다니다 보니 눈이 벌겋게 충혈되는 일이 많아서 그런다." 이한림은 박정희의 대답이 변명으로 들렸다. 탐욕 때문에 숱한 악행을 하고 보니 양심의 거울이라는 눈을 남에게 가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뉘앙스 같기도 했다. 그날 그는 박정희에게 국제적인 평가에 신경을 쓰라고 충고했다. 박정희와 정일권이 함께 그의 마음을 달래려고 노력했지만 큰 진전 없이 술만 마시고 헤어졌다.
해방 후 박정희의 군 생활과 가정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결혼했던 본부인과는 일찍 헤어졌다. 특히 1948년 10월 군 내 남로당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된 후 더욱 여러 가지가 꼬이기만 했다. 김창룡 특무대에서 조사받았지만 동료들을 밀고하는 진술서를 쓰고 그 대가로 풀려났다는 주변의 눈초리가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 터다. 그 진술서를 토대로 악명높은 특무대의 고문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천 명 안팎의 장교가 숙정당하고 그 중 상당수가 처형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제아무리 철면피한 사람이라도 자책감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구속돼 있는 동안 동거녀 이현란이 집을 나가 버려 더욱 쓸쓸한 남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현란은 육사 경리장교였던 박경원의 결혼식 때 신부 들러리를 섰는데 거기서 박정희의 눈에 띄어 함께 살게 됐다. 결혼식을 올렸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둘 사이에 아이가 있었으나 6개월 만에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희가 이렇게 우울할 때 미 군사학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한림이 그를 만난다. 박정희는 구속될 때 군복을 벗었지만 석방된 뒤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문관 신분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한림은 혼자 기거하는 박정희의 용산 관사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거듭 위로하며 친구의 정을 다했다. 그 후 박정희는 6·25 전쟁이 터지면서 현역 소령으로 복귀한다.
이처럼 불우한 군 생활을 한 박정희와 달리 이한림은 이승만 정부뿐아니라 4·19 이후 장면 정부에서도 가장 촉망받던 몇몇 장군들 중 한 명이었다. 1947년 국방경비대 연대장, 6·25전쟁 당시 사단장, 1952년 휴전회담 국군 수석대표, 1954년 군단장, 미 하버드대 유학, 1957년 육사교장, 1960년 제1야전군 사령관.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일본 군국주의 뼈대에다 미국 자유주의 교육의 옷을 입었다. 이종찬 장군 못지않게 그도 군의 정치개입을 끝내 반대, 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반혁명분자'로 낙인이 찍히고 만다. 이에 대해 한 군 출신인사는 "호랑이 장군 이한림이 시라소니에 불과한 박정희에게 물린 것"이라고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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