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을 대신해서 계백(이서진 분)에게 군권을 부여하는 백제 왕후(한지우 분).
MBC
10월 25일 방영된 MBC 드라마 <계백>에서는 의식불명인 의자왕(조재현 분)을 대신해서 왕후(한지우 분)가 왕권을 행사하는 장면이 나왔다. 드라마 속의 백제 왕후는 신라의 침공 가능성에 대비해서 계백(이서진 분)을 대장군에 임명하는 비상조치를 단행했다.
오늘날에는 통치자가 의식을 잃으면 국무총리나 부통령이 권한을 대행한다. 퍼스트레이디가 남편의 권한을 대행할 수는 없다. 아무리 비상시국이라도 퍼스트레이디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옛날에는 왕후가 비상시국에 통치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백제 때는 물론이고 조선시대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왕후들은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중전의 명목으로, 남편이 죽은 뒤에는 대비·왕대비·대왕대비의 명목으로 비상시국을 지휘했다.
참고로, 왕후는 남편이 죽은 뒤에도 왕후의 지위를 유지했다. 남편이 사망할 경우, 왕후가 잃는 지위는 왕후가 아니라 중전이었다. 왕후는 현재 임금의 부인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임금의 부인이나 부인이었던 여인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권한과 위상 높았던 왕후... 비상시국엔 최고통치권 행사대비·왕대비·대왕대비가 최고통치권을 행사하는 사례는 사극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그들은 어린 임금을 대신해서 수렴청정을 했고, 선왕이 죽거나 물러난 뒤에 신왕의 등극을 승인했다. 수렴청정은 남의 권한을 대리하는 경우인 데 비해, 신왕 승인은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는 경우에 해당했다.
중전이 최고통치권을 행사한 대표적 사례는 <세종실록>에 있다. 세종 8년 2월 15일(1426.3.23), 세종이 도성을 비운 사이에 한성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하자, 소헌왕후 심씨가 조정을 지휘하고 화재진압을 감독한 일이 있다. 오늘날 같았으면 서울에 남아 있는 총리급이 국정을 지휘했겠지만, 전통시대의 상황은 지금과 달랐다.
왕후가 수렴청정을 한 것이나 비상시에 조정을 지휘한 것은 임금의 권한을 대행한 경우에 해당한다. 하지만, 신왕의 등극을 승인하는 것은 자신의 독자적 권한을 행사하는 경우에 속했다. 임금과 관계없이 독자적인 비상대권을 행사했다는 것은 왕후의 권한과 위상이 그만큼 높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현대의 퍼스트레이디는 왕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대통령 등의 경호에 관한 법률' 제4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퍼스트레이디는 그저 '대통령의 가족'에 불과할 뿐이다. 이 점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왕후는 단순히 '임금의 가족'에만 그치지 않았다. 왕후는 임금을 대신해서 '보조적인 권력기관'의 역할을 하기도 했고, 자신의 권한에 입각해서 '독자적인 권력기관'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