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자이언트>의 한 장면.
SBS
내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와 12월 대통령 선거를 좌우할 키워드가 여기에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박정희 권력의 후예가 다름 아닌 한나라당이며 그 딸인 박근혜씨가 그 쪽에서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이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후예들이 저지른 정치적 죄과와 비자금 도적질 또한 심각하다. 전두환, 노태우만 보아도 그렇다. 그들에게 최소한의 사죄를 통한 '역사적 세례' 절차가 이행돼야 할 것이다.
박정희 권력의 야만적 고문악행은 비단 야당 국회의원들만 당한 게 아니었다. 어린 대학생들을 잡아다 몽둥이 구타와 물고문을 자행한 것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1987년 6·10 시민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서울대생 박종철군의 고문치사도 바로 박정희 정권의 후예들에 의해 저질러진 '계승 사건'이다.
1971년 10월 15일 대학가 위수령 때 교정에서 체포돼 동대문경찰서를 거쳐 중앙정보부로 압송된 나는 처음부터 넋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박정희 공포통치의 본산에 끌려 왔다는 생각에 혼비백산이었다. 압송조 2명이 나를 데리고 들어가자 책상에 발을 걸치고 앉아 있던 사내가 일어선다. 그다지 크지 않은 방은 아무런 비품도 없이 삭막했다. 그들은 나를 벽 앞 가까이에 무릎을 꿇려 앉히고는 앞만 쳐다보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나 지났을까, 다른 3인조로 교대됐다. 이들이 나를 다룰 맹수들이었다.
엎드려 뻗쳐를 시키더니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뭘 묻기도 전에 매질부터 하는 것은 기를 빼놓고 신문을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정신적 공포감과 함께 매질에 못이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 XX, 엄살이 심하구만."그들은 나를 붙잡아 앉히더니 정강이에 두꺼운 장작 같은 것을 넣고는 무릎 위를 구둣발로 밟아댔다. 무릎 관절이 절단 나는 고문이었다. 후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나는 무릎 위쪽 대퇴부 뼈를 3분의 1 가량이나 깎아내는 대수술을 해야 했다. 군대에 강제입영된 뒤 관절통에 시달렸지만 군 병원 후송도 허가되지 않았다. 야전 의무대에서 받는 소염진통제로 떼우며 그럭저럭 지내야 했다.
고문은 육체적 고통 못지않은 공포심으로 사람을 항복 시켜 버린다. 나는 모진 고통에 눈물 범벅이 되어 두 손으로 빌었다. 평생에 잊지 못할 가장 처참하고 굴욕적인 몰골이었다.
나는 1993년 이른바 문민정부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뒤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안기부의 수장이 된 권영해씨와 독대한 적이 있다. 그는 내가 국방부 출입기자 시절 취재원이었다. 그는 나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겠노라면서 원하는 것을 물었다. 나는 내가 고문 받던 방을 한번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빙긋이 웃더니 "무슨, 쓸데 없이…"하면서 그냥 넘기고 말았다.
"여기서 죽여버려도 자살했다고 하면 그만이야!"1971년 10월 당시 중앙정보부는 무언가를 짜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 사건'이라는 해괴한 각본이었다.
"김대중과 김상현이를 만난 게 언제, 어디서지?" 정말이지 이들과 만난 사실이 있다면 불지 않고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학생운동을 하면서 학교밖 정치인이나 종교계와 접촉한 적이 없다. 일종의 역할 분담으로 대외접촉은 주로 선배 복학생들이 맡았으며 나는 학교 내부 장악이 주 임무였다.
그들의 또 다른 요구는 돈 줄을 대라는 것. 포괄적으로 배후세력을 캐기 위한 고문이었다. 위수령 직전 나는 이른바 지하신문이라 불리는 미등록 간행물을 두 번 발행했으며 반응이 좋아 세 번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의단(議壇)'이라는 제호의 이 지하신문은 서울대 문리대 대의원회의 기관지 격이었다. 대의원회 의장이던 내가 발행인으로 유일하게 이름을 내걸었고 편집진은 모두 비밀이었다. 편집위원으로는 홍세화(현 한겨레 기획위원), 임진택(마당극 연출가), 이동진(가야대학교 교수) 등 9명이 활동했다.
그런데 고문자들은 지하신문의 편집진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오로지 돈을 댄 배후를 대라는 거였다. 이 문제도 사실 투명하게 입증되는 내용이었다. 법적으로 등록만 안 했을 뿐 문리대 대의원회 기관지이기 때문에 당연히 예산은 학생 자치경비 중에서 사용했다.
이런 뻔한 사실을 입증하는 데만도 험한 고문악행에 시달려야 했다.
"너, 이 방이 어떤 곳인지 알아? 여기서 죽여버려도 저 산에 던지고 투신 자살했다고 하면 그만이야 인마." 그해 대통령선거가 있던 4월 직전, 육군 대령 한 사람이 김대중 신민당 후보에 대해 지지하는 말을 했다가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의문사한 사건이 떠올랐다.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상태가 되는 듯했다.
책상 앞에 앉아 신문받는 동안 옆방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고문하는 자의 저주하는 욕설과 바닥에 나뒹굴고 쿵쾅거리며 절규하는 목소리가 뒤엉켜 정녕 인간 이하 짐승의 울부짖음이었다. 사람이 저렇게 당하고는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동료들과 얘기해 보니 대개 비슷한 경험이었고 공포감을 주기 위한 녹음소리인 것 같았다.
박정희 측근들도 시키는대로 안 하면 고문·폭행박정희는 자신의 측근 실세들도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항명자로 몰아 중앙정보부를 시켜 고문·폭행했다.
1971년 위수령 직전인 10월 2일, 국회에서는 당시 오치성 내무장관(육사8기, 5·16쿠데타 가담)에 대한 신민당의 해임결의안이 상정됐다. 박정희는 일사불란하게 반대표를 던져 이를 부결시키라고 공화당 지도부에 지시했다. 그런데 표결 결과는 공화당 의원들 중에 상당한 반란표가 생겨 해임안이 통과되고 말았다. 박정희의 이른바 '진노'가 표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