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규암면 백제문화단지에 있는 계백 장군의 자택(복원물). 왼쪽은 대문, 오른쪽은 마루.
김종성
지휘관은 낙관적이어야 한다. 병사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저 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를지라도, 일단은 "저 산만 넘으면 승리할 수 있으니, 나를 따르라!"고 격려할 수 있어야 한다. 출정도 하기 전에,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인상을 찌푸리는 것은 올바른 지휘관의 덕목이 아닐 것이다.
'계백 열전' 속의 계백은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 같았다. 출정 전에 계백은 군사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탄식한 뒤에 아내와 자녀들을 몰살했다.
"일국 백성의 힘으로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상대한다면, 나라의 존망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내 집사람과 자식은 노비가 될 터이니, 살아서 욕을 보느니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以一國之人, 當唐羅之大兵, 國之存亡, 未可知也. 恐吾妻孥沒爲奴婢, 與其生辱, 不如死快.)병사들의 사기를 높일 목적으로 자기 가족부터 죽이지 않았겠느냐고 말하지는 말자. 이런 행동은 병사들의 머릿속에서 승리에 대한 기대감을 말끔히 제거해주기에 충분하다. 전쟁 막판에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서 "기왕 죽을 바에는 멋지게 죽자!"고 독려하는 지휘관은 있어도, 승리 가능성이 높은데다가 아직 전쟁도 시작하지 않은 마당에 이렇게 부하들의 사기를 말끔하게 꺾어놓는 지휘관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백제 조정이 자신만만하게 플랜 B를 선택한 상황에서, 현장 지휘관인 계백이 암울한 분위기를 전파했다는 것은 매우 비상식적인 일이다. 거짓말로라도 낙관적 전망을 전파해야 할 마당에 "우리는 다 죽을 것"이라는 식으로 사기를 꺾어 놓는 지휘관이 과연 정상적일까. 계백이 '백제의 안티'였다고 한다면,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팩트 3> 신라군의 전력백제 지도부가 승리 가능성을 점쳤을지라도 계백에게 '달랑' 5천 명만 주니까 계백이 죽음을 예감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신라군은 5만이고 계백 부대는 5천이니 계백이 비장한 기분에 취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백제 조정이 병력이 부족해서 5천 명만 준 게 아님을 고려해야 한다. 황산벌 전투는 전쟁 초기에 벌어졌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병력을 더 충원할 수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다. 이는 조정에서 계백에게 5천 명만 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5천 명만 준 이유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신라군 5만이 백제군 5천의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라군은 나당연합군 전체의 보급을 책임졌다. 그래서 신라군 5만 속에는 비전투 병력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게다가 그 속에는 전투 경험이 없는 화랑들과 낭도들까지 대거 섞여 있었다. 그들은 숫자만 많았을 뿐, 처음부터 백제 정예군 5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계백 열전'에 따르면, 백제군은 황산벌에서 일당천(一當千)의 기세로 신라군을 상대했다. 또 백제군은 4차례의 회전(回戰)에서 4연승을 거두었다. 마지막 5회전에서 의외의 일격을 당하고 역전패한 것이다. 4회전까지의 결과를 보면, 백제군이 객관적으로 우세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7전 4승제의 '포스트 시즌' 같았으면, 4연승과 함께 백제가 '시리즈 챔피언'이 되었을 것이다. 4회전까지 5천 군대가 5만 군대를 갖고 놀았다는 것은, 5천 군대는 정예 병력이고 5만 군대는 그렇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계백이 신라군 앞에서 패배를 예감하고 가족부터 몰살했다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계백 부대는 신라군에게 졌다. 이것은 객관적 전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이 어린 화랑인 반굴과 관창이 영웅적 최후를 맞이하자, 이를 보고 분노와 용기가 치솟은 신라군이 갑자기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고, 뜻밖의 상황 앞에서 백제군이 당황하는 바람에 상황이 일거에 뒤집힌 것이다. 신라군의 승리는 '반굴·관창 효과'가 낳은 우연의 결과였다.
계백 열전, 어느 유능한 소설가의 명작이라고 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