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3일 호주 캔버라 국회의사당에서 러드 총리가 '원주민가족 와해정책'에 대한 사과 연설을 하는 동안 한 원주민 여성이 방청석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제일 경악할 만한 범죄는 따로 있다. 바로 백인들과 원주민 간 '동화정책'이라는 이름 아래 원주민 자녀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떼어놓은 일이다.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동이 늘어나자 이들을 백인사회로 흡수시키기 위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가족와해정책'은 연방정부 특별법에 의해 일괄적으로 시행됐다.
호주 정부는 각 주의 법령을 통해 원주민 부모로부터 아이들을 떼어놓는 것을 인가해 1900년에서 1972년 사이에 전체 원주민 아이의 10~30%로 추정되는 최소 10만 명(원주민 측 주장)의 혼혈아동들이 부모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아이들이 그 미개한 사람들과 미개한 곳에서 살지 않도록 '구출'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렇게 혼혈아동에게 남은 원주민의 흔적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시행된 정책인 만큼 주로 피부색이 하얀 원주민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강제로 떨어져야만 했다.
그 때문에 원주민 부모들은 일부러 자기 아이들의 피부를 검게 만드는 일까지 자행했다고 한다. 이렇게 부모와 떨어진 아이들은 수용소 등에서 백인화, 문명화 교육을 받은 후 순수 원주민에 가까운 혼혈은 강제노역 현장으로, 백인에 가까운 혼혈은 신문광고 등을 통해 백인 가정에 입양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은 행복했을까? 오히려 생지옥으로 내몰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애초 사랑하는 엄마의 품에서 강제로 떨어지는 것 자체가 이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질 노릇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제까지 거침없이 쓰던, 원주민의 말을 해서도 안 됐다. 이렇게 전혀 다른 생활환경 속에서 적응하는 일은 그 자체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얌전히 '문명화' 과정만 거쳤다면 사실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열악한 수용소에서 아이들은 대부분 굶주림과 구타에 시달려야 했다.
예컨대 3살 때 가족으로부터 떨어져야 했던 로이 스튜어트(Roy Stewart)는 그가 수용됐던 뉴사우스웨일즈 킨첼라수용소(Kinchela Boys' home)에서 겪은 기억 때문에 77살에 죽을 때까지 평생을 악몽에 시달렸다. 그는 수용소에서 술 취한 감독관이 때려죽인 아이들을 땅에 묻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수용소 안에 있던 혼혈아동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못했던 셈이다. 이들이 수용됐던 고아원이나 교회 시설의 담벼락에는 탈출을 막기 위해 철망을 쳐놓기도 했다고 하니, 사실상 감옥과 다름없었다.
노동착취와 성폭행... 백인 가정의 '노예'였을 뿐그렇게 '문명화' 과정을 거친 아이들이 마침내 백인 가정이나 선교기관에 도착한 순간, 이제 '불행 끝 행복 시작'이었을까. 아니, 더 큰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상 여자아이들은 가정부로, 남자아이들은 농사나 노동일을 돕기 위해 백인들에게 보내졌기 때문이었다. 구타당하는 것은 예삿일이었으며 거의 노예와 맞먹는 수준의 노동착취까지 당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중 10분의 1이 넘는 아이들은 성적 학대를 당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그중 한 명이 1941년생 발레리 리노우(Valerie Linow)이다. 그녀는 2살 때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보매더리수용소(Bomaderry Children's home)에서 살다가 1958년 16살 때 백인 목축업자 가족의 하녀가 되었다. 사건은 그녀가 17살이 되었을 때 일어났다. 발레리가 우유 양동이를 엎지르는 실수를 하자 목축업자가 그녀를 무지막지하게 구타한 것.
"그는 갑자기 내게 '들어가 있어' 하고 소리쳤고 몇 분 뒤 울타리용 가시가 박힌 철사로 제 다리를 때렸지요.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하려 몸을 웅크렸고 결국 다리에 흉터가 생겼어요."그의 폭행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발레리를 폭행한 그는 그녀에게 방으로 들어가라고 소리치더니 따라 들어와 그녀를 침대에 던진 후 성폭행했다. 만신창이가 된 발레리는 용기 내어 경찰에 신고했지만 역시나, 그 목축업자는 기소되지 않았다. 경찰에게 있어서 혼혈아동의 인권은 지켜줄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권이란 '백인의 권리'였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아이들에게 심각한 육체적·정신적 후유증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강제로 고아가 된 그들은 평생을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고, 백인 가정에서 자신의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낮은 자존감, 우울증, 불신, 자괴감, 분노 역시 몸집을 불려갔다.
이 같은 학대와 정신적 고통을 견디기 위해 이들은 썩은 동아줄을 잡듯이 약물과 알코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통째로 잃어 버렸던 것이다. 이 불쌍한 고아들의 후손들은 아직도 가족을 찾고 있으며 자기들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켜 'Stolen Generations(도둑맞은 세대)'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