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패임금이 대신을 불러들이는 패. 조선 말엽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고종의 수결이 압인돼 있다
이정근
임금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주저앉고 싶을 만큼 다리가 풀려 있었다. 임금의 명을 받은 승지가 명패(命牌)를 내었다. 전령을 태운 말들이 시좌소 문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임금이 발행한 신표를 소지한 저승사자들이다.
국가 위난시에 퇴청한 대신들을 불러들이는 증표가 명패다. 임금의 수결을 압인한 패를 두 쪽으로 나누어 하나는 승정원에서 보관하고 하나는 부름을 받는 자에게 전달했다. 신표를 소지한 사람이 궁에 도착하면 숙위하던 승정원 주서가 패를 대조하고 입궁시켰다.
전령이 떠난 것을 확인한 수양은 입직하던 봉석주로 하여금 내금위 군사들에게 갑주를 갖춰 남문을 방비하게 하고 입직하는 별시위 갑사와 총통위로 하여금 홍달손을 엄호하게 했다.
길거리에 혁명사령부를 설치하다밖으로 나온 수양은 순졸(巡卒) 수백 명과 함께 가회방 입구 돌다리에 지휘소를 설치했다. 순군(巡軍)으로 하여금 시좌소 앞뒤 골목을 차단하게 하는 한편 서쪽으로 영응대군 집 동구와 동쪽으로 서운관 고개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출입을 통제하게 했다.
시좌소 외곽에 군사를 배치한 수양은 가회방 돌다리로부터 남문까지 마병(馬兵)과 보병(步兵)으로 네 겹의 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수하에서 가장 힘이 센 함귀와 박막동 그리고 수산과 막동에게 제3문을 엄중히 지키라 명했다. 제3문은 시좌소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이다. 만반의 준비를 완료한 수양이 영을 내렸다.
"시좌소가 좁으니 들어오는 재상은 수종하는 종을 데리고 들어오지 말고 혼자 들어오도록 하라."칠삭둥이가 작성한 살생부에 따라 피고 지는 꽃잎들이윽고 임금의 부름을 받은 병조판서가 제일 먼저 도착했다. 가마에서 내린 사람이 조극관이라는 것을 확인한 한명회가 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순간, 함귀의 철퇴가 작렬했다. 골이 튀고 피가 튀었다. 시강원 세자 사부로 양녕대군을 잘 보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태종에게 내침을 당했던 조극관이 그의 손자 수양에게 희생된 것이다.
잠시 후, 한확과 정인지의 가마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한명회의 손을 주시하던 막동이가 칼자루에 힘을 주었다. 허나, 한명회의 손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 입구를 통과하던 한확과 정인지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이 널브러져 있고 피가 낭자하지 않은가.
"이게 어찌된 일이냐?"정인지가 목소리를 높였다.
"에혀, 알려고 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셔. 더 알려고 하면 다친다니깐."구레나룻이 시커먼 사내가 눈알을 부라렸다. 노 재상 정인지와 한확이 젊은이들의 손에 떠밀려 안으로 들어간 다음 예사롭지 않은 수레가 도착했다. 외바퀴 수레(軺軒-초헌)였다. 일인지하만인지상 영의정의 수레라지만 조금은 사치스러웠다. 하얀 수염을 흩날리며 수레에서 내린 사람이 황보인이라는 것을 확인한 한명회가 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 그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막동이의 칼이 번쩍였다. 황보인이 선혈을 쏟으며 꼬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