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식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
권우성
대표적인 호남(전북 고창) 출신 언론인인 김 위원은 정치권의 영입 제의도 심심찮게 받았다. 김 위원은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대변인 제안을 거절했던 일화를 털어놓기도 했다.
"10년 전 청와대 대변인 제안을 거절했던 적이 있다. 평생 저널리스트로 자부하면서 중립적인 길을 걸었는데 특정 정부, 정파 프로파간다(선전) 하는 데 나 자신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당시 DJ 후반기여서 '조중동'과 청와대가 대립하는 마당에 관용차 타려고 직분 등진다는 게 걸렸다. 생애를 저널리스트로 마감하겠다는 꿈을 정리하기 어려웠다."김 위원은 지난해 청와대에서 새로 만든 사회통합수석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청와대에서 공식적인 제안은 없었다. 언론 보도나 사이드(비선)을 통해 알았다. (청와대에서) 6.2지방선거 참패 후 소통 인사를 해야 희망이 있다는 자성 목소리가 나왔는데 누군가 나를 천거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김 위원은 "현빈이 해병대 간 뒤 다른 군에서 왜 현빈 못 데려왔느냐 따졌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그게 해병대나 현빈 잘못은 아니지 않나"는 말로 자신과 현 정부 관계에 대한 오해를 일축해다. 만약 그때 공식 제안이 왔더라면? 김 위원은 망설임 없이 "(현 정부와) 생각과 가치관이 달라 거절했을 것 같다"고 밝혔다.
그런 그가 야당 추천이긴 하지만 어떻게 해서 엄연히 정무직 공무원(차관급)인 방통위원을 맡게 됐을까?
"방송과 통신이 미디어의 중심이 되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 스마트TV로 상징되는 방통융합은 이제 우리 삶의 일부가 되고 있다. 신문이라는 당대의 핵심 미디어에 30년 가까이 봉직해온 '미디어맨'으로서, 변화하는 '핵심' 미디어를 담당한다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고, 보람이라고 생각했다."미디어 정책 집행자인 방통위원 역시 신문기자, 미디어학자에 이은 '평생 저널리스트'의 연장선으로 본 셈이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야당 추천 방통위원' 자리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1기 방통위는 정연주 KBS 사장 해임 등 방송 장악이나 종편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야당 위원들 역시 최시중 위원장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했고 이병기 전 위원이 '중도 하차'하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상임위원 5명 중에 청와대와 여당 쪽 3명이 다수결을 무기로 밀어붙여 왔다. 약자와 시민사회를 대변하려는 두 야당 위원을 허수아비로 만들어온 것이 방통위 1기의 역사다. 그런 구조적인 족쇄를 차고 어떻게 2기에서 국민 눈높이에 맞춰 공명정대한 미디어를 구현하고 스피드가 요구되는 통신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지 숙고하고 있다.""<동아> 마지막 10년은 고통... 논조 편향 고치려다 그만둬"1978년 동아일보 입사해 사회부,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던 그는 전두환 군사 독재 서슬이 시퍼렇던 지난 1985년 '필화' 사건으로 안전기획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때 경험은 1992년 <남산의 부장들>이란 베스트셀러로 이어졌지만 개인적으로 충격적인 경험이기도 했다.
"악몽이었다. 모두 지나간 얘기지만 부당한 고문과 초법적 박해가 젊은 저널리스트의 열정을 자극하고 더 도전하게 만든 자극제가 됐다."이런 유명세 덕에 그는 평기자였던 1993년 39세 최연소 논설위원이 돼 화제를 낳았다. 당시 논설위원이란 차장, 부장 거쳐 빨라도 50대는 돼야 이름을 얹을 수 있는 자리였다. 이후 사회부장, 문화부장, 도쿄지사장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했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뒤엔 논조를 놓고 사주 측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결국 2006년 9월 동아일보를 그만두고 가천의대와 경원대에서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활동하기까지 30년 가까이 현업에 몸담았지만 언론시민단체에선 오히려 미디어 공공성 활동에 참여한 적이 없다는 지적이 있었다.
"미디어 공공성은 30년 기자 재직하는 동안 20여 년을 실천했다고 자부한다. 마지막 몇 년은 힘들었고 결국 신문사를 떠났다. 2000년대 들어 동아일보 내부에서 후배들과 공공성 문제를 논하고 동아 논조의 편향성을 고민하고 시정을 모색했다. 그게 잘 안 돼 대학으로 와 공공성을 연구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