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와 처벌 : 감옥의 역사>(미셀 푸코 저/오생근 역) 겉표지
나남
푸코의 여러 저작이 국내에 번역되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읽기 쉬운 책이 없다. 번역의 문제도 상당하다. 도대체 읽고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감시와 처벌: 감옥의 역사>(오생근 옮김, 나남출판)은 상대적으로 읽을 만하다. 해설서도 다수 나와 있으니 그 의미를 아는 데는 크게 어려움이 없다.
푸코의 해설서 중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서상복 지음, 김영사)은 푸코와 하버마스를 대비한 책인데 어려운 푸코를 이해하는데 그만한 책도 없다.
그럼에도 <감시와 처벌>은 만만한 책이 아니다. 볼륨도 볼륨이지만 웬만한 끈기가 없으면 책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법학을 공부한 내가 푸코에 대한 책 몇 권을 읽고 이 책을 알기 쉽게 소개하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은 인권을 매일 같이 이야기하고 연구하는 나에게도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는 책이다. 푸코가 이야기하는 것이 결국 인간의 자유와 관련되어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내 분야이기 때문이다. 푸코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고 내 시각을 보태 이 책을 풀어보고 그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감옥의 역사, 신체형에서 자유형으로<감시와 처벌>은 다음과 같은 유죄판결문으로 시작한다. 매우 충격적인 예이다. 그대로 옮겨 보자.
"손에 2파운드 무게의 뜨거운 밀랍으로 만든 횃불을 들고, 속옷 차림으로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문 앞에 사형수 호송차로 실려 와, 공개적으로 사죄할 것" 다음으로 "상기한 호송차로 그레브 광장에 옮겨진 다음, 그곳에 설치될 처형대 위에서 가슴, 팔,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한 채, 유황불로 태워야 한다. 계속해서 쇠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 버린다."(23쪽)이 판결은 실화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루이 15세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다미엥이라는 사람에 대한 판결문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일이다. 우리도 근대 이전에는 이랬다. 조선시대 대역 죄인에 대한 능지처참형이 바로 그것이다. 성삼문 등 사육신이 받은 형벌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능지처참형이 다미엥이 받은 거열형에 근접했을까. 나는 그렇게는 보지 않는다. 유사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이 우리 조상들 보다 더 참혹했다. 서구인들의 과거 신체형은 우리의 상상을 넘는 공포 그 자체였다. 푸코는 이를 지극히 화려하고 호화스런 의식이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하였다.
왜 이런 처벌을 내렸을까. 권력에 감히 도전하지 말라는 경고이다. 누구도 왕권, 권력에 도전하면 이런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민중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극약처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극악한 신체형이 18세기 후반 이래 감옥에다 범죄인을 감금하여 교정하는 자유형으로 바뀌었다.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이제 더 이상 신체에 손을 대지 않는다. 감옥이라는 공간에 감금한 다음 규율을 통해 교육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형벌의 목적이 되었다.
이것은 합리적 계산에 입각한 효과적인 징벌의 원칙을 적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원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원칙이 있다. 이들 원칙 모두가 언뜻 보아도 매우 합리적이다. 첫 번째 원칙인 '양의 최소화 원칙' 하나만 보자.
"범죄는 그것이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범죄에 대한 그런 생각에, 그것보다 어느 정도 큰 형벌의 불이익을 결부시키게 되면 범죄는 저지르고 싶지 않은 행위가 될 것이다." (148쪽)가혹한 형벌을 신체에 부과하지 않아도 범죄인이 형벌의 불이익을 생각하여 범죄를 억제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오히려 그 이상의 처벌을 하려다 보면 범죄인은 완전범죄를 노릴지도 모른다. 그러면 범인 잡기만 어려워진다. 그것은 결국 범죄인이 권력을 농락하는 꼴이 된다. 그러니 이러한 원칙은 고도의 계산이 따른 것이다. 일종의 심리학이 동원된 것이다.
사람을 진짜 다룰 줄 아는 사람은 강압적인 물리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이고 관념적이어야 한다. 예컨대, 계량화를 통한 비용-효과분석을 형사정책에도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합리주의적 사고가 아닌가. 이런 사고의 결과가 바로 신체형에서 감옥이라는 새로운 제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규율의 실체, 국가가 신체를 통제하고 정신을 통제한다새로운 감옥의 탄생은 단순한 형벌제도의 변화가 아니다. 푸코는 이 변화가 18세기 말부터 본격화된 인간과 사회를 합리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규율사회'의 건설이라는 측면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본다.
감옥은 그 규율사회의 하나의 전형일 뿐이다. 푸코에 의하면 규율사회는 감옥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학교, 병원, 군대, 공장 등 주요한 사회기관 모두는 알게 모르게 공통적으로 인간의 신체에 관한 과학적인 관리법을 적용하여 예속적이고 복종적인 인간을 만들어 내는 곳이다.
복종적인 인간, 푸코가 말하는 근대국가, 근대사회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사회의 시스템이 우리들을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 사회가 규격화한 사람만이 쓸모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으로 키워지고, 그렇지 않으면 도태된다. 아니 어떤 때는 사회가 설정한 정상의 기준에서 일탈한 광인이 되어 사회의 쓰레기가 된다. '쓰레기가 되고 싶지 않으면 인간들이여 사회의 규율에 따르라' 이것이 근대사회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