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
유성호
- 그때 새벽에 국방장관에게 전화하셨다고 했는데.
"그랬다. 새벽 2시쯤이었을 것이다."
- 당시 장관은."조성태 (국방)장관이었다."
- 무슨 말씀을 나눴나."좀전에 이야기했듯이, 구제역이 처음에 통제가 매우 중요하다. 면사무소 직원이나 경찰 등에 맡기게 되면, 아무래도 인정상 철통같이 막기가 어려운 사정이 있다."
- 군 병력을 빼서?"(물을 한잔 마시면서) 군 병력을 빼는 것이 아니라 이동을 (국방장관에게) 부탁을 했다. 관사로 직접 전화를 해서, 파주로 통하는 24곳에 초소를 세워 (그 지역으로) 들어오거나 나가는 소, 돼지와 차량을 통제해달라고..."
- 장관의 반응은 어땠나."처음에 황당하다는 목소리였다. 대뜸, '구제역이 뭐요?'라고 묻더라. 그래서 '사람으로 치자면, 에이즈(AIDS)와 같은 병인데, 전파력이 너무 강해서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질 수 있다. 잠복 기간이 있어서, 순차적으로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김 전 장관은 당시 국방장관과의 대화 내용 등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그는 "당시 국방장관은 '군의 이동은 대통령의 재가가 필요하다'며 처음에 부정적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장관의 말은 옳았지만, 상황이 너무 급박했었다"면서 "다음날 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리고, 사후 재가를 받겠다고 어렵게 설득했다"고 그는 전했다.
- 다음날 대통령에게 곧바로 보고했나."아마 해 뜨자마자 청와대로 갔을 것이다. (군 병력 이동에 대해) 솔직히 부담되긴 했다. 그때 김대중 대통령께서 '방역은 제2의 국방'이라며 '부처가 서로 긴밀하게 협력해 잘했다'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故) 김대중대통령,'방역은 제2의 국방'이라고 하자 전 부처 협력"
- 그때도 파주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확산하지 않았나."그랬다. 국내 최대 한우농가가 있는 충남 홍성, 충주, 화성, 안성, 마지막이 아마 용인이었을 것이다."
- 초기에 군부대를 동원해 방역해도?"(담배를 다시 꺼내 들며) 구제역이 그렇다. 그때 군에서 인력뿐 아니라 장비까지 동원돼서, 살처분까지 다 했다. 다섯 번째로 확산했을 때, (구제역) 백신 접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이번에도 정부가 백신 처방을 최대한 신중히 했는데."그랬을 것이다. 당장 축산농가들의 반발이 거세다. 주사 맞고도 죽으면, 가격이 떨어지면 어떡하냐는 것이다. (2000년에는) 이런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파격적인 보상과 지원책을 썼다."
당시 정부는 살처분 뿐 아니라 방역조치로 인한 농가 손해까지 보상해줬다. 보상은 당시 시세를 그대로 반영했다. 이뿐 아니다. 축산농가에 대해 사료 값 면제, 농가부채 감면, 생활비 보조와 자녀학자금 면제, 장기저리 자금 융자 등을 정부가 지원을 약속하면서, 농민들의 협조를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다시 김 전 장관의 말이다.
"그때 그런 보상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김 대통령께서 '피해 농민의 보상에 대해 기대 이상으로 파격적으로 하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정부 입장에선 당장 재정적으로 부담될 수밖에 없는 일인데···. 지나고 보면, 오히려 그렇게 해서 빨리 진화시킨 것이 (경제적으로도) 이득이 됐던 것이지."이번 구제역 파문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6일에서야 청와대서 긴급대책회의를 열었다. 작년 11월 28일 구제역 발생한 지 무려 40여 일 만이다. 이미 100만 마리 넘는 소, 돼지가 매몰된 상태였다. 내놓은 대책 역시 "설 연휴 때 대규모 이동에 대비하라"는 수준이었다.
김 전 장관은 "2000년 민관의 적극적인 협조로 살처분한 가축 수를 2200여 두 정도에서 막을 수 있었다"면서 "국제수역사무국에서도 구제역을 가장 잘 수습한 나라로 우리나라를 꼽을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이후 구제역은 정부 차원에서 시스템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매뉴얼로 만들어져 있는 상태"라며 "이번에 과연 매뉴얼대로 움직였는지 의문이 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중에 구제역 음모론까지...올 봄, 제2차 환경 대재앙 올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