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펼치면서 생각합니다. <the maya, palaces and pyramids of the rainforest> 같은 책 하나는, 저로서는 가 볼 수 없는 곳 삶과 삶터와 사람을 책으로 만날 수 있는 기쁨과 고마움을 베풀어 줍니다. 살림돈도 적지만 여권마저 없는 저는 마야 문명 터전을 보러 몸소 찾아가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나라안에서 나온 볼 만한 책이 있지도 않아요. 마야이든 아즈카이든 어디이든 나라밖 사람들이 내놓은 나라밖 말로 된 책을 헌책방에서 찾아서 읽습니다.
<요네하라 마리/김윤수 옮김-인간 수컷은 필요없어>(마음산책,2008)라는 책을 고릅니다. 고양이와 개를 기르던 이야기를 담은 수필책인데, 뭔 놈 책이름이 요 모양인가 싶지만, 한국이든 일본이든 수컷이라는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헤아린다면, 이런 소리를 들을 만합니다. '사람 수컷'이 얼마나 바보스러운지요. 막개발이나 전쟁을 일으키는 이들은 사람 수컷입니다. 주먹다짐으로 동무를 괴롭힌다든지 이웃을 못살게 구는 깡패들 또한 사람 수컷이에요. 총을 만들고 사람을 죽이는 재주를 가르치는 군대 또한 사람 수컷이 꾸립니다.
그러나 이렇게 불쌍하거나 딱하거나 모자란 사람 수컷이기 때문에, 사람 암컷은 불쌍한 사람 수컷을 따스히 어루만지며 타이를밖에 없습니다. 딱하거나 모자란 사람 수컷은 너그럽고 아름다운 사람 암컷을 마주하면서 슬기롭고 착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해요.
(3) 새롭게 다시 사는 책
<알렉스 헤일리/김종철,이종욱,정연주 옮김-말콤 엑스 (상∼하)>(창작과비평사,1978 첫/1993 고침)를 만나고, <존 헨릭 클라크/김영일 옮김-말콤X와 검은 혁명>(일월서각,1982)을 만납니다. <말콤X와 검은 혁명>은 도서관에 갖춘 책이지만 <말콤 엑스>는 도서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찾아내지 못해서 다시 장만합니다. 굳이 새로 안 사도 될 만하다 여길 수 있지만, 우리 도서관이 깃든 웃마을에 있는 이오덕자유학교를 다니는 열세 살 푸른 벗님이 이 책들을 읽고 싶다고 하기에 얼른 새로 사든 찾아내든 해야 했어요. 마침 <동네책방> 책꽂이에서 두 가지를 나란히 마주합니다.
.. 미국의 노예제도와 '집단의 일부를 살인하는 것'은 두 개의 전쟁으로 연결되었다. 멕시코전쟁과 남북전쟁. 인종에 기초하여 경찰, 법원, 백인 우월론자 집단에 의한 암살은 오랫동안 미국에 횡행되어 왔는데 최근에 고조되고 있다. 인종 학살은 그 성격상, 억압받고 있는 민중의 도전성보다 더욱 침략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암살의 범죄는 더욱 증가되고 있다. 헤이즈 틸든 타협 뒤에 테러리즘이 따랐다. 1·2차 세계대전 뒤에 테러리즘이 따랐다. 한국전쟁기와 2차 대전 전후에 매카시즘이 뒤따랐다. 더우기 인종학살은 대의 문제에 명확하고 확실한 관계를 가진다. 우리가 말하는 인종학살은 인기없는 베트남전쟁에 뛰어든 미국의 개입과 분리해서 생각되어질 수 없다. 콩고에 인기없는 미국의 간섭과 분리해서, 전 나찌 군국주의자와 비슷한 인기없는 미국의 일치와 분리해서, 쿠바를 전복하기 위한 인기없는 전쟁과 분리해서, 인종학살을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기없는 전쟁과 간섭은 민중을 침묵시키고 민중의 저항 의지를 진정시킨다. 미국 흑인 시민에 대한 폭력은 미국인의 생활 전반에 늘어나는 억압과 비례한다 .. (534쪽)
이오덕자유학교 열세 살 푸른 벗님은 '말콤 엑스'를 읽습니다. 제도권학교 열세 살 푸른 벗님 가운데 말콤 엑스를 읽을 이들이 있을까 궁금한데, 이 벗님은 말콤 엑스에 앞서 노신을 읽었습니다. 열세 살 푸른 벗님한테는 말콤 엑스이든 노신이든 어려울까요?
저는 말콤 엑스나 노신을 열너덧 살에 읽지 않았나 떠올립니다. 그무렵에 이들 책을 읽으며 그리 어렵다고는 느끼지 않았습니다. 외려 왜 이와 같은 책을 나한테 알려주는 어른이 진작에 없었나 하고 서운했습니다. 아쉽다면 번역은 그리 정갈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뭐, 다른 책이라 해서 번역이나 창작 말투나 말씨가 정갈하지는 않아요.
우리들이 우리 스스로 읽을 책을 찾거나 우리 아이들한테 읽힐 책을 살핀다 할 때에는, 눈높이도 살펴야 하지만 책에 깃들어 놓은 이야기를 살펴야 한다고 느낍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이야기일는지를 살피고, 얼마나 고운 이야기인가를 돌아보며, 얼마나 참답고 착한 이야기인가를 톺아보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곧은 한길을 신나면서 즐겁게 꾸리는 데에 길잡이가 되는 책인가 아닌가를 헤아려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림책 <존 버닝햄/김원석 옮김-장바구니>(보림,1996)를 봅니다. 썩 재미있다고 느낍니다. <다카하시 루미코-高橋留美子 걸작단편집 1>(하이북스,2002)를 봅니다. 곰곰이 책장을 넘기는데, 아무래도 해적판이군요. 다른 해도 아닌 2002년에까지 일본 만화를 해적판으로 내는 출판사가 있었다니 놀랍습니다. 참말, 한국땅 책마을이란 어디까지 막나가는지 알쏭달쏭합니다.
마지막으로 <정은숙-책 사용법>(마음산책,2010)을 고릅니다. 이 책도 책이름이 이게 뭔가 하고 슬펐으나, 책을 말하는 책이기 때문에 고릅니다. 책에 붙이는 이름이란 책을 쓰거나 내놓는 사람들 마음입니다. 책이름이야 그다지 눈여겨볼 만하지 않다 할 수 있지만, 책이름은 책 하나가 담은 넋을 모조리 보여주는 한 줄로 간추린 이야기입니다. 책을 읽고서 쓰는 느낌글은 꼭 한 줄짜리 느낌글부터 원고지 1000장짜리 느낌글까지 골고루 있습니다. 책에 붙이는 이름이란 바로 '한 줄짜리로 쓰는 느낌글'이에요. 그런데 "책 사용법"이라니.
'왜, 책도 쓰지(사용하지) 말란 법이 있남?' 하고 물을 분이 있을 텐데, 책은 쓸 수 없습니다. 책은 다룰 수도 없습니다. 책방 일꾼이라면 책방에서 책을 다룬다고 할 테지만, 책을 읽는 사람은 책을 '읽을' 뿐, 다룰 수 없어요. 책은 물건이 아니라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책을 파는 쪽에서는 그냥저냥 다룬다 할 만할 테고, 책을 잘 다루거나 건사하거나 갈무리해 주는 손길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이 책 <책 사용법>은 책을 파는 일꾼 자리에서 들여다보거나 헤아리는 책이 아니라, 책을 읽는 사람 자리에서 살피며 이야기를 엮으려는 책입니다.
.. 어느덧 나도 젊은 날의 파토스와는 많이 멀어진 듯하다. 이제는 좀더 명료하게 현실적으로 사물과 예술을 바라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김수영의 문학은, 그의 산문과 시는 언제나 나를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온다 .. (212쪽)
시쓰던 김수영 님은 글을 잘 쓴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글을 못 쓴 사람이 아니에요. 김수영 시인은 김수영만큼 글을 쓴 사람입니다. 김수영 시인이 쓴 글은 더 잘나거나 더 못난 대목이 없이, 오로지 김수영입니다. 시쓰는 김수영 님은 당신이 파블로 네루다가 될 마음이 없었고 정약용이 되려는 꿈도 없었습니다. 그저 김수영 시인은 김수영 시인으로 살면서 김수영 시인답게 당신 길을 걸었습니다.
<책 사용법>을 내놓은 정은숙 님은 정은숙 님 삶을 일구면서 정은숙 님 글을 쓰면 넉넉합니다. 김수영 문학이 당신한테 예나 이제나 깊은 곳부터 울리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정은숙 님 또한 스스로를 울리는 이야기를 쓰면 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어느덧 나도 젊은 날의 파토스와는 많이 멀어진 듯하다" 하고 털어놓습니다. 꾸밈없이 털어놓습니다. 숨기지 않는 모습은 고마우며 반갑습니다. 그러나 숨기지 않는다고 해서 아름다운 글이지는 않아요. 글을 굳이 아름답게 써야 할 까닭이란 없어요. 글이란 내 삶을 사랑하면서 써야 하고, 글이란 내 삶을 사랑하는 길을 씩씩하고 즐겁게 걸어가는 하루하루를 되살피면서 써야 할 뿐입니다.
파토스하고 멀어지면 어떻고 파토스처럼 그대로 살면 어떻습니까. 그저 그대로 내 삶과 결과 목숨과 눈매와 손길을 사랑하거나 아끼면 돼요. 다만, 정은숙 님은 아직 이 대목을 느끼지 못하는 듯싶습니다. 무언가 더 느끼셨다면 "책 사용법"이 아닌 "책 사랑길"이라든지 "책 나눔빛"이라든지 "책 물줄기" 같은 이름으로 당신이 책을 매만지며 돌보아 온 스물여섯 해 발자국을 한결 알뜰살뜰 엮었으리라 봅니다.
(4) 작은 길은 작은 걸음으로
즐겁게 고른 책을 가방에 싸서 가져가지 못합니다. 제 가방에는 아이 옷가지랑 먹을거리가 잔뜩 들었거든요. 이제는 책방마실을 하며 사들이는 책은 늘 택배로 맡깁니다. 웬만하면 가방에 짊어지고 돌아가려 하지만, 버스길이나 기차길에서 아이한테 읽힐 그림책 몇 권을 빼고는 택배로 맡겨야 한다고 느낍니다. 더욱 젊던 날 혼자서 살아가던 때라면 마땅히 가방에 꾹꾹 눌러담고 자전거 짐받이나 짐수레에 꽉꽉 채우든지 끈으로 질끈 묶어 영차영차 날라서 가져가겠지요. 옆지기하고 둘이 살던 때까지만 해도 택배로 책을 보내던 일은 몇 번 없습니다. 늘 팔 빠지고 허리 빠지도록 들고 이고 지며 날랐습니다.
<동네책방> 건너편에는 창영초등학교랑 영화초등학교랑 영화여상이 있습니다. 요 옆으로 중구 유동 쪽으로 가면 정보산업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조금 더 오르면 도원동 꼭대기에 광성 중·고등학교가 있고, 더 안쪽으로 가면 숭의1동 중앙여상이 나오고, 신흥동1가를 지나 답동성당 건너편에 신흥초등학교, 큰길 건너 사동에 인천여상, 동인천 쪽으로 가면 인일여고와 인성 초·중·고등학교, 제물포고등학교 들이 있습니다. 테두리를 넓혀 송림3동 쪽으로 가면 동산 중·고등학교에다가 박문여고하고 선인재단 학교들이 나와요.
그리 먼 옛날까지는 아니고, 딱 열 해쯤 앞서만 하더라도 이들 학교에서 배다리 헌책방거리로 걸어서 오가며 책을 사는 사람이 드문드문 있었습니다. 저는 스무 해쯤 앞서 고등학생 때에 한 시간 이십 분을 걸어와서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십 분이나 이삼십 분을 들여 천천히 골목을 구비구비 돌고 돌면 여러 책방을 만납니다.
더 많은 책을 더 싸게 사들이는 헌책방이 아닙니다. 더 좋다 할 만한 책을 더 값싸게 찾아내면 좋을 <동네책방>이 아닙니다. 그저 책 하나 기쁘게 만나면 좋을 책방입니다. 내 삶을 밝히는 데에 도움꾼이나 길잡이가 되어 줄 예쁘고 반가운 책 하나 즐거이 마주하자는 책방마실입니다.
작은 책방으로 작은 사람이 작은 걸음을 내딛는다면 기쁘겠습니다. 작은 책으로 작은 가슴에 작은 사랑을 소담스레 피워올린다면 반갑겠습니다. 작은 손으로 작은 지갑을 열어 작은 돈을 꺼내어 <동네책방>이든 배다리 헌책방거리이든, 작은 열매 알뜰살뜰 담긴 책들을 살가이 보듬는다면 고맙겠습니다. 책은 삶이고, 삶은 책입니다. 책인 삶을 찾는 사람이고, 사람으로 사랑하며 일굴 삶을 만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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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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