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벌교 특공대. 왼쪽은 백제 병졸 거시기(이문식 분).
씨네월드
그런데 이 영화를 포함해서, 백제 최후의 날을 다룬 문학책이나 영상물 등을 볼 때마다 매번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그것은 거의 모든 작품이 한결같이, 백제의 멸망을 '사전에 예약된 불가피한 운명'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미지를 조장한 주범 가운데 하나로 <삼국사기>를 꼽을 수 있다. 백제 최후의 순간이 담긴 <삼국사기> '의자왕 본기'('본기'는 제왕의 연대기)를 읽노라면, 백제의 멸망이 너무나 당연했던 것 같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의자왕이 이미 오래 전부터 술과 여자와 유흥의 늪에 푹 빠져 있었다거나, 백제 멸망 직전에 백제 왕궁에 여우가 난입했다거나 여자의 시체가 백제의 나루터에 떠올랐다거나 사비성의 우물 색깔이 핏빛 같았다거나 하는 등의 기록들을 읽다 보면, 누구라도 '백제의 멸망은 하늘에 의해 이미 정해진 것이었구나' 하는 느낌을 은연중에 갖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삼천궁녀의 신화가 실상은 중국에서 유입된 것이라는 사실(제2편에서 취급), '술과 여자에 탐닉했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백제 멸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선데이 서울'에나 나올 법한 갖가지 사건사고들을 백제 멸망의 징조로 끌어다 붙였다는 사실 등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런 선입견을 배제하고 <삼국사기> '의자왕 본기'를 포함하여 관련 자료들을 다시 읽어보면,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백제군이 객관적 전력에서 나당연합군에게 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패색이 짙어진 뒤에 의자왕이 자국의 패인을 객관적 전력이 아닌 '작전 미스'에서 찾은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의자왕이 이런 판단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당나라 군대(이하 '당군')가 덕적도에 도착한 때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하자.
당군이 서해에 진을 치고 있고 신라군 역시 출동한 상태에서, 백제 조정에서는 비상 전략회의가 열렸다. 회의에 참석한 대신들은 크게 두 부류의 의견으로 갈렸다.
1급 공무원인 좌평 의직(義直)은 "당나라가 우리에게 패배하는 모습을 보면, 신라는 감히 나서지 못할 것"이라며 "당나라를 먼저 치자"고 제안한 데에 반해, 2급 공무원인 달솔 상영(常永)은 "당나라와는 대치국면을 유지하고, 약한 신라군을 먼저 격파하자"며 "그런 뒤에 당나라를 치자"고 제안했다. 신라는 자신들의 적수가 안 된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했지만, 어느 쪽을 먼저 치는 게 좋으냐를 놓고 의견이 갈렸던 것이다.
어느 쪽을 채택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의자왕의 머릿속을 스친 인물이 있었다. 유배 중인 좌평 흥수(興首)였다. 흥수라면 묘안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의자왕은 사람을 보내 그의 의견을 물어보도록 했다.
흥수의 의견은, 평야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승패를 예측할 수 없으니, 기벌포(금강 입구)에서 당군을 묶어두고 탄현에서 신라군을 묶어둔 상태에서 장기적인 대치국면을 유지한 뒤에 적의 군량미가 떨어지면 그때 가서 총공격을 가하라는 것이었다.
기벌포와 탄현은 천혜의 요새라서 적군이 아무리 많다 해도 소수의 병력과 소량의 무기만으로 충분히 방어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기벌포와 탄현에서부터 적을 묶어두면 장기전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흥수의 생각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 원정군이 군량미 문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을 한 것이다. 참고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기벌포에는 몇 리나 뻗은 개펄이 있어서 침략군이 상륙을 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냥 통과하기도, 그렇다고 상륙하기도 힘든 곳이 기벌포였던 것이다.
흥수의 의견은 실은 같은 당파인 성충(成忠)의 유서에 기초한 것이었다. 전 좌평 성충은 흥수 등과 함께 실각한 뒤에 감옥에 갇혔다가 위와 같은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하직한 바 있다. 위에 나온 의직과 상영은 성충·흥수와 대립적인 관계였다.
그러나 흥수의 의견은 채택되지 않았다. 조정 대신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임금과 나라를 원망하고 있을 죄인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조정 대신들이 흥수의 의견에 반대한 것은 그 틈에 성충 라인이 복귀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국 백제 조정의 전략은, 기벌포와 탄현을 열어주고 적이 좁은 길을 통과할 때에 공격을 퍼부어 속전속결로 끝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당나라 전함들이 기벌포를 통과해 금강에 진입하여 일렬로 전진할 때에 군사를 풀어 공격하고, 신라 병사들이 탄현에 올라 좁은 길을 일렬로 통과할 때에 역시 군사를 풀어 공격하자는 전략이었다. 이는 적군을 독 안으로 끌어들인 뒤에 한 번에 죽이자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