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비얀카 승선장100년 전 안중근 의사는 바로 이 부두에서 블라디보스토크행 배에 올랐다.
박도
그물코 세상다시 승용차에 탔다. 그새 땅거미도 지기 시작했다. 조씨는 자기 소개와 함께 살아온 얘기를 했다. 자기는 사할린동포 2세로 아버지 고향은 경북 청송이라고 했다. 당신은 할머니의 열성적인 교육열로 사할린에서 모스코바대학에 유학하여 그곳 화학공업대를 졸업하고 건설회사에 다녔다고 했다.
1991년 블라디보스토크 고합지사로 옮긴 뒤, 10여 년 근무하고는 은퇴했다고 했다. 고합 장치혁 회장이 연해주 출신 독립운동가 장도빈의 아들로 극동대학을 설립하는 등, 이곳 독립운동기념사업에 힘썼다. 그러다 보니 그가 한국 독립운동관계자들을 여러 번 안내하게 되어, 은퇴 후에도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를 방문하는 러시아 현지 독립운동 관계 한국인들을 안내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원대 박환 교수를 비롯하여 한국독립운동사 학자와 광복회 보훈처 전현직 인사들의 이름을 들먹였다.
마침 나의 첫 중국 항일유적답사에 전 비용 및 안내인까지 주선해 준 이영기(전 전주지검장) 변호사가 사할린동포 법률구조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마침 내가 그 일을 정리하였기에 그때 기억에 남은 인사의 이름을 생각나는 대로 말하자 모두 잘 아는 사이라고 했다.
특히 임종구씨는 한때 하얼빈에 안중근 동상을 세우는 일을 기획하면서, 나에게 국민성금 모금운동에 앞장 서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정중히 거절한 적이 있었다. 임종구씨는 일제강점기 때 집안을 위해 이름을 속이고 형의 징용장을 대신 가지고 사할린에 갔던 이라, 그의 별난 인생을 오마이뉴스에 기사화한 일이 있었다. 사실은 이번 답사에 그분과 동행하려고 출국 전에 연락했더니 부인이 그새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관련기사; 한 사할린 동포의 마지막 꿈 2005. 7. 17.).조씨는 나를 통해 임종구씨의 운명 소식을 듣고는 세상은 마치 그물코처럼 얽혔다고 놀라워 했다. 그러면서 세상을 살아가며 거짓말하거나 죄를 짓고 살기 어렵다는 말에 서로 공감했다. 조씨는 부인이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이라 사할린동포 1세대로 인정받아 곧 한국으로 영구 이주할 거라고 하면서, 나에게 한국사회의 실정을 꼬치꼬치 물었다.
러시아 여인도착 후 유적지를 바쁘게 돌다가 보니 그만 점심을 놓쳤다. 자동차에 주유도 할 겸 한 휴게소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는데, 음식을 장만하는 러시아 여인이 매우 아름다웠다. 사진 한 컷 찍어도 괜찮으냐고 양해를 구하자 그는 좋다고 대답하고는 마주 쳐다보기가 부끄러운 양 계속 눈을 내리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