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의 사당인 대빈궁(大嬪宮)이 있었던 자리. 지금은 서울시 종로세무서가 들어서 있다. 대빈궁은 1870년에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자리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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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최 숙빈이 최소한 '미필적 고의' 정도는 갖고 있었다는 점은 '최 숙빈을 잘 아는 한 남자'의 태도에서도 간접적으로 표출된다. 최 숙빈을 잘 아는 한 남자란 숙종을 두고 하는 말이다. 최 숙빈이 장 희빈의 비행을 보고한 지 보름 정도 지난 숙종 27년(1701) 10월 7일에 숙종이 발표한 하교에서 그 같은 정황을 포착할 수 있다.
10월 7일은 장 희빈이 죽기 하루 전날이었다. 장 희빈의 죽음이 이미 예정되어 있던 때였다. 따라서 이제는 누구도 장 희빈을 더 이상 견제할 필요가 없는 시점이었다. 그런데 이 날, 숙종은 향후 관습법이 될 다음과 같은 하교를 내렸다.
"이제부터 나라의 법으로 삼노니, 빈어(嬪御, 후궁)가 왕비에 오르게 해서는 안 된다."앞으로는 후궁이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이 하교는, 중전과 후궁들이 뒤얽혀 유혈을 부른 지금의 사태가 다시는 재현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계와 반성의 메시지를 후대의 왕들에게 전하고 있다. 그것이 이 하교의 표면적 메시지다.
그런데 이 하교는 누군가를 겨냥한 또 다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언뜻 보면, 다음날 죽게 될 장 희빈을 겨냥한 하교인 것처럼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장 희빈이 중전이 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마당에 굳이 그를 겨냥해 관습법 하나를 새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노련한 정치가인 숙종이 그처럼 무의미한 입법을 했을 리는 없다.
이 하교가 누구를 겨냥한 것인가는, 이 하교로 인해 가장 피해를 입을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데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이 하교 때문에 가장 피해를 입을 사람은 당연히 최 숙빈이었다. 인현왕후가 죽은 마당에 장 희빈까지 사라지면 최 숙빈이 가장 유력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를 고려하면, 이 하교가 다름 아닌 최 숙빈의 중전 책봉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가로막는 입법조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만간 장 희빈이 죽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내심 고무되어 있었을 최 숙빈. 그는 하교를 듣는 순간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장 희빈, 꼴 좋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마 소름끼쳤을 것이다. 하교의 표적이 자신이라는 점을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최 숙빈의 중전 책봉을 가로막는 법을 제정했다는 사실은, 숙종이 최 숙빈의 심리상태를 간파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숙종은 최 숙빈이 중전 자리에 무심한 여인이 아님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숙종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사실은, 그가 최 숙빈을 중전 자리에 앉힐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하필 그 시점에 그런 하교를 발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9월 7일에 방영된 <동이> 제50회에서, 숙종이 동이를 정1품 빈에 책봉한 일을 두고 장 희빈 쪽의 관료인 장무열(가상의 인물)이 '임금이 최숙의(동이 지칭)를 중전 자리에 앉히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고 해석했지만, 실제로 최 숙빈이 빈에 책봉된 시점은 인현왕후가 죽기 2년 전인 숙종 25년(1699)이었으므로 이 일은 차기 중전 자리에 대한 숙종의 의중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일이었다.
드라마 속 동이는 무심한 듯 보이지만, 야망은 있었네